자본주의의 맹점마저 돈의 허방다리로 멋지게 감추어버린 그들은,
인간의 학문과 지식마저 모노폴리를 시도하고 있다.
 
이 빌어먹을 유물론은 언제쯤 무너지겠느냐?
알 수 없다.
 
이곳에 주님이 계신가?
그렇지 않은데 왜 무너지지 않고 있는가?
 
사실, 아직 다시 오시지 않은 것이 더 다행일지도 모른다.
아직 기회가 있다.
한 사람만이라도 더, 아직 구원할 시간이 있다.
문제는, 얼마나 남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뿐.
어쩌면, 알 수 없다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일지도 모른다.
주님의 방식은, 언제나 그랬으니까. 그러므로 결론은 같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위해서라는 합리화는 이제 그만두고, 주님의 영광을 위해 일해야 할 때이다.
아직은 청년의 때이기에. 시간을 아끼자, 이미 악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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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배하라고 명령받은 것조차 우리를 위한 것? 너무 실존주의에 찌든 사상 아닌가? 왜 인간의 철학으로 신학을 분석해야 하는가? 게다가, 정말로 실존주의가 발전된 철학이라 할 수 있는가? 단순히 현대철학의 한 조류에 불과하지 않는가? 무조건 최근의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잖은가. 예배하라는 명령은, 애초에 우리의 창조 목적이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자유의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스스로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단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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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오늘날 정도의 부흥을 “그런 힘든 시절도 있었지” 하며 회상할 수 있는 시대가 오기를 갈망한다. 그리고 솔직히, 지금은 힘든 시기이다. 풍요로운 시기이기에, 더더욱 타락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왜 그러한가? 길을 잃었기 때문이다. 눈앞에 거대한 시련이 느껴질 때는, 그 시련을 극복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하지만 풍요의 때에는, 다른 자극적인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리고 그러한 자극은, 대부분 우상에 있다.
 이 시대에는 우상이라 불릴 만한 것이 너무나 많다. 주님보다 더 사랑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이다. 지금 당장 무엇이 중요하다고 말하는 세상에 속지 말자. 세상에서 무엇이라 말하든, 세상을 다스리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우리는 지극히 이성적인 크리스챤이다. 주님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기회비용이 작은 선택, 즉 가장 가치 있는 선택이다. 알 수 없을 것이다. 아니, 절대로 알 수 없다. 우리가 주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을 수는 있다. 주께서 믿으라 말씀하셨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해야 할 것은 단지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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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이 말은 귀족의 존재 기반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이 말은, 단순한 좌파의 철학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떠한가? 현재도 동일하다. 한국의 보수주의 사상은 현재의 지배 계층을 옹호(혹은 정당화)한다. 좌파의 분배론은 귀족 계층(이라 부르고 '계급'이라 읽는다)에 대한 공격이다. 분배? 이미 분배라는 말 자체가 길을 잃어, 스스로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됐다. 좌파정권은 목적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시민단체마저 합법적으로 불법화 당하였으나, 좌파의 무능으로 인한 정치력 부족으로 대항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들은 혼란을 추구하는 것으로밖에는 비춰지지 않는다. 물론 보수주의 언론들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행복한 자 or 충분히 계몽되었지만 불행한 자.
 차라리 배부른 돼지가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불만족스러운 비평가. 이러한 배고픔을 타인도 느끼게 하려는 단순한 심술. 나는 단지, 세상에 ‘고통’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은... 고통을 동반하는 마약이며, 바이러스이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항상 쓰게 비웃어주고는 있지만, 가장 큰 적은, 가장 무지한 자는, 역시 나 자신. 더 이상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어 멍청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이미, 계몽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가치가 측정되지 않는 것은 버려진다. 계몽의 가치는 도박이다. 도박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우리 계몽주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도덕적이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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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인간이 합리(合理)적 소비를 한다고 치자. 그러한 인간은 최저 비용 최대 만족을 추구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다. 합리적 소비를 위해서는 시장의 모든 재화를 비교해 보아야 한다. 또한 모든 재화가 단 1mm의 공간적 이동도 없이 매매가 가능해야만 진정으로 효율적인 시장을 만들어 낼 수 있다. 물론, 이것은 불가능하다. 바로 물리적 한계 때문이다. 이 한계가 바로 경제학에 지리학적 관점을 대입해야 하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현재까지 인간이 생산하는 재화는 대부분의 경우 내구도와 무게, 부피 등의 속성을 지니고 있고, 그 문제가 해결되기 까진 지리학적 관점이 경제학에 포함되어야 한다.
 또한 완전한 합리주의는 사고(思考)의 범위 내에 타인을 포함한다. 사람은 완전히 개인주의적인 사고를 지닐 수 없다. ‘사람’이라는 전제 내에 이미 사회적 존재라는 의미가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개인만을 위한 합리성을 지닌 사람이 있다면, 그 자체로 이미 사람으로서의 존재 가치를 상실한 것이다. 사람이란 사회 안에서 자라나기 마련인데, 사회 안에서 자라난 사람이 사고의 범위 내에 타인을 배제할 수 없다. 그것은 이미 사람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사람은 이타(利他)적일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당장 생각해 낼 수 있는 비판만 해도 이렇게 두 가지가 나온다. 이 두 가지는 주로 경제학 보다는 경제학 외적인 학문에서 주장되어온 것이다. 하지만 타당한 비판이며, 납득할 만하다.
 하지만 실제는 어떠한가? 생각해보자. 이 모든 것을 변수로 대입해서 판단하는 것이 가능한가? 실제로 경제학적 분석에서는(특히 미시경제학) 어떠한 모델을 선정할 때, 다른 조건들은 쳐내어 버리는 경우가 많다.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는 모델은 현재 경제의 상황을 더 잘 설명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를 환원론(還元論)적 관점이라고 한다. 환원론적 관점이란 ‘지극히 단순화되어 있는 모델은 사회의 모습을 반영하며, 이렇게 공식화되어 있는 모델을 통하여 또 다른 상황을 예측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환원론적 관점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서, 이러한 모델들의 총합은 현재 사회의 모습이 된다고 본다. (기계론(機械論)적 관점과도 연결되지만 그것은 나중에 설명하겠음) 실제로도 많은 부분이 이러한 관점을 통하여 설명되고, 또 그것이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위의 비판은 적절하지 않은 측면이 있다.
 우선 첫째로, 경제학적 모델은 실제의 모습을 ‘반영’ 할 뿐이다. 경제학의 연구 방법론에서 모델을 설정하는 것은, 문제를 단순화하기 위함이다. 이러한 문제 단순화를 통하여, 연구의 편이성을 추구하는 것이 경제학이라는 뜻이다. 합리성을 추구하며 그러한 합리성을 달성하기 위해 연구하는 학문이 경제학이다. 그러한 학문에서 합리적이지 않은(보편화가 불가능한)방법론으로 연구를 한다는 것은 논리가 맞지 않는다.
 둘째로, 경제학은 철학이 아니다. 경제학에서는 ‘불변(不變)의 진리(眞理)’를 확립하기 위해 연구하지 않는다. 경제학은 철학이 아닌 과학의 성격을 지니기 때문이다. 개개인의 속성이나 사회 일부분의 속성은 이론과 다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전체적 합’으로서의 이론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오류’나 ‘변수’를 통하여 더 이론의 정확성이 올라가야 하는 것이 과학으로서의 경제학이다. 
Posted by 미노하
 자주 가는 인터넷 게시판의 글 중에 이런 제목의 글이 있었다. “한국은 아직도 인터넷 강국(强國)인가?”
 언론(言論)에서는, 당연하다는 듯이 한국을 IT 강국이라 칭하고, 누구나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 실상(實狀)은 어떠한가? 갑자기 불안한 생각이 들었다. ‘아닐 수도 있잖아’ 라는 생각.

 ADSL 등장 이후 국내 초고속인터넷 산업은 눈부신 발전을 거듭했다. 초창기 ADSL은 속도가 8Mbps 수준으로 전화 모뎀을 연결한 인터넷 속도인 128kbps 보다 63배 정도 빨랐다. 최근 들어 초고속인터넷은 100Mbps의 속도를 자랑하는 댁내 광가입자망(FTTH)으로 발전했다.
[이데일리]

 물론 여기까지는 좋다. 충분한 기술적 인프라가 갖추어져 있고, 그것이 일반인에게 충분히 보급(普及)된 상태이다. 하지만 꼭 이것이 안정된 상태로 유지될 수 있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한국의 정보기술(IT) 강국 위상이 흔들리고 있다. 정보통신기술(ICT)이 경제 발전과 국가 경쟁력에 미치는 영향을 평가한 네트워크 준비지수(NRI) 순위에서 한국이 세계 10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인터넷 이용률 등 양적인 면에서는 상위권을 지키고 있지만 각종 규제 등에 묶여 정작 IT가 경제 발전에 제대로 기여하지 못하고 있는 탓이다.
[한국경제]

 전문가들은 정부의 IT정책 부재로 인한 필연적인 결과라고 지적한다. IT 정책을 총괄하던 정보통신부를 이어받은 방송통신위원회가 IT 정책을 제대로 주도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IT 관련 예산도 푸대접받고 있다. 최근 정부는 28조9000억원에 이르는 추경 예산안을 확정하면서 IT · 소프트웨어(SW) 뉴딜 부문 예산을 당초 5000억원에서 3361억원으로 크게 삭감했다. 서승모 벤처산업협회장은 "발전 속도와 변화가 빠른 IT는 국가 차원의 시나리오를 갖고 정부가 꾸준히 육성해야 하는데 이를 전담할 부처는커녕 IT 벤처기업의 애로 사항을 들어 주는 곳조차 없다"며 "과감한 규제 완화는 물론 IT 기업들이 체감할 수 있는 정부 정책이 절실하다"고 말했다.
[한국경제]

 10대들이 사이버 폭력에 가장 취약한 계층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청소년 문제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에선 연예인 등 유명인의 자살 사건이 발생할 때나 '악성 댓글'에 대한 관심이 반짝했다가 무심해지곤 했다"며 "실제 얼마나 많은 청소년들이 인터넷에서 댓글이나 모욕성 글로 상처를 받고 심지어 자살까지 하는지에 대해선 잘 알려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인터넷 강국이 되려면, 그것을 실제로 활용하여 생활(生活)과 산업(産業)에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한다. 또한 그에 대한 충분한 정책(政策)적 배려와 지원을 통한 그 산업에 대한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만큼 인터넷 사용자의 정신적 성숙(네티켓 같은)도 중요하다.
 하지만 위의 사실들이 말을 해 주듯, 현재 우리나라 IT 산업의 상황은 정말 ‘모래 위에 지은 성’ 과도 같다. 현재 한국의 IT 개발 정책은, 발전에 대한 명확한 방법론(方法論)조차 제시되지 않은 채, 표류(漂流)하는 배의 상황이다. 게다가 정책의 중요성(重要性)마저 속된 말로 ‘땅파기 정책’ 에 의해 뒷전으로 밀려 난 상황이다. IT 강국이 아닌 IT ‘소비’ 강국이라는 말도 흘러 다니고 있는 형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는 언제 우리가 IT 강국의 자리에서 물러나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다.
 그러므로 인프라에 대한 무계획(無計劃)적 투자나 지원 보다는, 그 인프라를 사용해서 소비함과 동시에 재생산(再生産)할만한 콘텐츠의 확충(擴充)이 필요하다. 또한, 초등학교 저학년 때부터의 인터넷 윤리(倫理) 교육의 확충을 통해, 인터넷 사용자의 정신적 성숙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고 저작권(著作權)의 확립과 유통구조(流通構造) 개선 등을 통해 소프트웨어 산업의 성장을 꾀하여야 한다.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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