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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3 사회발전론 기말고사
  2. 2011.07.06 아늑하다

1. “빈곤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렌탈회사(혹은 리스)의 경우를 볼게요. 이들은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미리 상품을 구매해서, 일정한 대여료를 받고 상품을 빌려줘요.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에서는, 이런 렌탈회사들을 분석할 때는 기존 상품의 판매방식 관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죠. 새로이 등장하는 이런 판매자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들은 경험을 판매합니다.

이제 자본, 좀 쉬운 용어로 바꾸자면, 상품(아예 의미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논의는 그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의 회전력은 굉장히 높아지고 있어요. 컴퓨터의 경우를 볼까요? 무어의 법칙이란 것이 있어요. CPU의 처리속도가 18개월마다 2배씩 높아진다는 것이죠. 조금 더 격하게 바꿔볼까요? 3년마다 4배씩, 9년이면 64배의 발전을 합니다. 자본의 순환주기보다 기술의 발달이 더 빨라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 자본가들은 기존의 생산시설이 낙후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리스라는 상황을 통해서 거대 자본에게 종속되는 현상을 보이죠. 물론 여기서 종속이라는 말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겠지만, 거대 자본 중 어떤 거대 자본과 연결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결국 프롤레타리아화라는 현상은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등장하기 시작한 클라우드 컴퓨팅이 이를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개인은 컴퓨터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죠? 그래서, 개인은 그러한 발전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클라우드 컴퓨팅입니다. 클라우드란, 컴퓨터의 작업을 특정 서버 컴퓨터에 연결해서 수행하며, 개인의 컴퓨터는 단순한 수신기(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니터)역할만 수행합니다.

대표적인 클라우드 컴퓨팅의 예로는 애플의 icloud(혹은 아이튠즈), 구글의 대부분의 서비스들, dropbox, Wolfram Alpha 등이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이러한 클라우드 서비스가 반 무료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특정한 요금체계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각각의 부품회사, 혹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가질 수 있었던 수익들이, 특정 대기업에게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살펴볼 것이, 이는 모두 서비스업입니다. 클라우드의 생산자든 소비자이든, 결국 서비스를 사고파는 것이죠. 혹은 이에 부가되는 첨단 산업도 고부가가치 산업이긴 하지만 결국 부의 집중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O-Ring Theory 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순간 이러한 발전 속도를 놓치게 된다면, 기존에 서비스의 생산자의 위치에서 클라우드의 소비자로전락하게 된다는 뜻이죠.

소프트웨어 산업을 예로 들어도, 모든 프로그래머가 MS에 있는 사람들처럼 부자가 아닌 것처럼 말이죠. IOS나 안드로이드 같은, 좀 더 가까운 곳에서라면, WindowsOSX같은, ‘위대한수준의 OS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지구 반대편(대표적으로, 한국)에는 그저 코딩하는 노예일 뿐인프로그래머들이 발에 차이도록 많은 상황입니다.

세계화는 국가 간의 경계선을 흐려 놓았고, 낮아진 국경의 담을 넘어 거대자본(혹은 국가)들은 중소규모 자본(혹은 국가)들의 영역을 침식하고, 또 흡수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부의 편중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실, 말이 좋아 편중이지, 반대로 말하면 빈곤의 세계화, 혹은 빈곤의 보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본주의의 강화추세는, 개별 경제주체의 유동성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려 노력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의에서처럼, 액체 근대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사회의 변화 속도는 점점 빨라지지만, 쁘띠 부르주아지, 혹은 쉬운 말로 자영업자들은 그러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죠. 이는 가까운 슈퍼마켓만 보아도 알 수 있죠. 구멍가게가 살아남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미 대기업들이 이런 틈새시장의 영역을 침범하여, 종속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중소규모의 자본은, 그러한 흡수를 버틸 능력이 없습니다.

오픈마켓의 경우, 한국의 지마켓과 옥션은 이미 이베이(eBay)의 자회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이 쇼핑몰을 열어 성공할 수 있다던 과거의 성공신화들은, 말 그대로 신화의 수준으로만 남게 되죠. 개인들은 그저 이러한 거대 쇼핑몰의 고객이 되는 상황입니다.

클라우드 자체에 대한 소유권, 혹은 생산수단은 거대 자본가에게로 집중됩니다. 렌탈(리스)회사들은 경험을 판매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본을 빌려주어서, 그것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하죠. 사용한다는 경험 자체를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 자체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고정됩니다.

한국의 기술체계, 특히 휴대폰 기술의 경우는 이미 갈라파고스로 변해 버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하여, 외부에 대한 적응력이 극도로 낮아진 상황이죠. 이는 내수시장이 자체의 생산력을 통제범위 안에 둘 수 있는 상황에서는 상관없었지만, 클라우드가 도입될 정도로 통신 기술이 발달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빠르게 흡수당했습니다.

맨 처음 한국에 아이폰이 등장할 시기에는 윈도우 모바일(이하 WM)등을 사용하여 기존의 피쳐폰 체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안드로이드 & IOS”의 시장 양분 체계를 만들어버렸죠.

클라우드 컴퓨팅의 시장 또한 동일합니다. GMail 등이 대용량메일과 메일 처리 시스템의 클라우드화를 이룩하자마자, 한국에서도 자체 서버를 사용하여 대용량메일을 시도해야 하는상황이 만들어집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될 뿐이니까요.

한국의 경우는 더 시급한 것이, 매우 뛰어난 인터넷망을 활용하려는 개인의 적극적 의지에 의해 촉발됩니다. 비정규직법과 FTA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외국 노동력의 수입이 훨씬 쉬워지는 상황과도 쉽게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겠네요.

결국 기업은 스스로 발전할만한 동력이 부족해집니다. 공룡기업들이 보편적으로 등장함에 따라, 결국 중소규모의 기업들은 흡수당하거나, 혹은 도태당해야 하는 양 갈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이러한 현상에 반하는 사례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겠지만(한국에서의 V3, 카카오톡 등이나, 외국의 중소규모 게임회사에서 만든 대작들) 일반적인 분석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결국 20:80의 사회 논의는, 그나마 예외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혹은 벤처기업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겨졌던,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도 이렇게 노골적인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가 이루어집니다. 현재의 사회적 혼란에 대해, 한국의 경우는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를 사용하여, 책임을 전가시키죠. 이러한 특정한 자체는 모든 문화 체계 안에 존재합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복지일 수 있고요, 어떤 곳에서는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일 수 있겠죠.

물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소비적 복지에 대한 비판은 충분한 정당성이 존재합니다. 복지로 인해, 그것의 수요자들은 상황의 변화에 대한 일종의 방어력이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스펜서의 유기체적 사회 논의에서 볼 수 있다시피,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분업에 의해, 자신들의 역할 이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업을 겪는다면, 혹은 한번 생산수단을 흡수당한다면(빼앗긴다면), 다른 직종으로 쉽게 옮겨갈 수 없는 상황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생산적 복지입니다. 노동시장에서 가치가 없어진, 혹은 시스템 상에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재활용하기 위한 것이 그러한 생산적 복지, 즉 교육입니다. 교육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배경에서 등장했다고도 할 수 있죠.

출발점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준 이후에경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출발점은 동일하지만, 절대로 길 자체가 동일할 순 없습니다. 누군가는 내리막길을 달릴 테고, 누군가는 진흙길을 달리고 있겠죠. 진흙길을 달리는 사람은 결국 그 진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멈춰버리거나, 혹은 빠져나오기 위해 뒤로 걸어야 합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뛰어가는 데 방해된다는 핑계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병조차도 빼앗겨야 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잘 뛰는 사람을 잘 뛰게 두어야한다!”라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됩니다.

 

2.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신뢰제고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오.

 

여기서도 예를 들어 설명해볼게요. 08학번에게 있어서 입시제도란, 말 그대로 저주받은형태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저주받은 89”라고 칭하기도 하죠. 그래서 08~10까지의 89년생끼리는, 서로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이 존재합니다.

지옥 같은 입시형태를 거쳐서, 결국 대학이라는 곳에 왔다는, 그래서 거기서 만났다는, 일종의 동료의식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것은 비단 저희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94학번들이 그랬고, 더 이전에는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그랬죠.

이러한 특정 세대들의 공통점은, 결국 각각에게 일종의 연대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청소년기에 겪었던 특정 사건, 혹은 조건들은, 개개인의 의식 속에 매우 깊은 수준까지 박혀 있게 됩니다.

이는 자신들의 이익집단적 세대개념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단순한 언어적 공동체(혹은 상상의 공동체)’수준에서 끝날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이라면, 이러한 시간으로서청년기의 구성주의적 계기로 인해, 실제로 이런 세대적 공동체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옆에 있는 학우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을지라도,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학교라는 이름으로 공유하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같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같은 지역, 심지어는 같은 국가(외국에 나가 있을 때라면)에도 해당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식은 결국, 서로에 대해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즉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다면, 결국 사회의 연결망 자체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알 수 없다면, 상대방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며, 결국 상대방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적 자본(혹은 신뢰)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위에서 말했던 저주받은 89’ 역시, 스스로가 겪어본 입시제도이며 동시에 상대방도 그것을 겪었으리라는 기대의 연장선상에서, 그러한 경험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예측가능성, 혹은 지식은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상대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힘으로서 작동하죠. 하지만, 공유라는 말을 일치라는 말로 살짝 바꿔준다면, 지식 자체는 권력뿐만 아니라 연대감 형성에도 작용할 수 있게 됩니다. 지식이 권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식의 공유로 인해 상호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연대감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기반입니다.

물론 이런 단순한 세대개념이 사회적 자본으로 발달하려면 아직 많은 난관이 존재합니다. 경험의 공유로 형성되는 공동체는,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인 형태로 작용합니다. 결국 이는 사회적 자본의 편중현상으로 인해 갈등이 구조화되어, 결국 더 큰 갈등을 부를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반 자체는,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더 넓은(혹은 더 많은 사람을 포괄하는)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보편적인 집단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과거에 2002 월드컵 때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축제적 분위기에서의 사람들은, 의례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순간만큼은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는 것이죠. 문제라면, 그것이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특정한 상징물(예를 들자면 광장에 축구선수나 축구공 동상을 세운다든지)이 존재하지 않는 의례는,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종교단체, 특히 교회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최근 교회에 대한 많은 공격은, 그들의 기부금(헌금으로 칭하겠습니다)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음에 기인합니다. 물론 이는 기독교 성경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을 너무 충실하게 지킨 나머지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 모르게 했기 때문에, 결국 교회라는 단체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자신의 헌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모른다는 것은, 예측가능성의 저하와 일맥상통하죠. “내가 너 꿍꿍이속을 모르는데 널 어떻게 믿어?”라는 질문이 이런 상황에 잘 맞는 질문이 되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은 교회 내에서의 수많은 의례를 통해,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측면으로 무마시킵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최소한 교회 내부에서는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깥으로, 미디어에서 드러날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미디어는 미디어 나름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고, 미디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폐쇄성(혹은 불투명한 예산 집행)을 비리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즉 종교단체들의 이미지적 정당성을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죠.

이와 똑같은 이치를 국가로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법치국가라는 곳에서 법 집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만연해있고, 공무원들은 자신의 업무에 태만하다는 내용의 담론이 이미 구성돼있으며, 아이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믿음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왔죠.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하고, 그것은 곧 비용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그럭저럭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 대해 알 수 있고(지식), 서로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통한 권력적 의사소통(혹은 의사-의사소통, pseudo-communication)이상의, 상호 영향력을 지니는 대화는, 사회적 연대감을 증진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공론장의 개념은 매우 이상적인수준에서나 말해질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공론장이 형성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 자체를 나누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공론장의 형성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가 대안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들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만 듣게 됩니다. 국민신문고 등이 정부에 대한 의견 제출의 문으로 작동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요청-수용/거부의 단선적인 측면일 뿐이지, 담론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혹은 국가라는 체계 자체)는 너무나 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예측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되죠. 국가의 경우도, 종교단체도, 사회 조직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대한것들에 대한 신뢰 확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개인 수준에서 연대감 형성을 통한 신뢰를 확립해야 합니다. 청년기 시절부터 어떤 특정한 연대감을 지닐 만한 단체, 혹은 의례에 참여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그것이 실제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하는 담론을 형성합니다.

정부의 신뢰도라면, 공기업의 임금 체계 개선이나, 경제 관련 비리에 대한 처벌 강화가 답이 될 수 있겠죠. 즉 법적 체계가 강화되어야 합니다. 싱가포르의 육체적 처벌과 같은 비인간적인 법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일벌백계적 측면은 필요하니까요.

속된말로, “정부는 까야 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정부를 까는사람들에게 깔 거리를 주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죠. 비리 등에 대한 완전한 공개와 처벌을 통해, 정부 자체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아예 이성적 측면을 강화시켜서 쇠울 속에 넣는 것입니다.

 

3. 한국사회에서 개발독재(development dictatorship)의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를 비교하여 논하시오.

 

먼저, 다른 이러저러한 것 말하기 이전에, 경제가 발전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발전이 아닌 성장이라고 해야 맞겠지만요. 어쨌든 이런 수치상의 성장 자체는 한국 사회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 성장으로 인해서 국가적 신뢰도도 함께 올라갔죠. 이는 국가경쟁력의 강화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국제관계에서도 수많은 이점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최근 의궤 반환의 경우가 있어요. 과거에는 의궤 반환에 대한 주장의 방식이 단순히 윤리적인 요청에 불과했던 반면,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경제적 부담감의 방식으로 압력을 선사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또한, 독재의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지배 시스템 역시, 현재에도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베이비붐 세대의 경우, 독재 정권의 경찰국가적인 검열시스템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지금에 와서도 어느 정도는 자기 검열을 수행하곤 하죠.

물론 이것이 개인에게는 긍정적인 일로 작용하지 않을지라도,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는 어느 정도 안정에 기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까지 이어 오는 보수정당의 집권 자체는, 정치적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죠. 이러한 정치적 안정성은, 한국 사회의 경제력 발전에 큰 도움을 미쳐왔고, 또한 일종의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현재는 이런 보수정당들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일부분일 뿐입니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 최소한 한국 인구의(혹은 정치 참여자, 즉 투표자 비율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현재의 시스템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급배반이든, ‘국개론이든, 심지어 그것이 “XX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식의 자포자기식 신음일지라도, 결국 그에 대한 지지도 자체는 그리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경제관념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묘한 이중주를 만들며, 점점 더 견고한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놀랍도록 안정적인 형태죠. 개발 독재 상황에서의 풍요, 하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하면 성공하는 개인이라는 관념 자체는, 현재 영웅적 세대들의 꾸중의 이중주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종의 좋았던 옛 시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경제가 성장했고, 높은 안정성을 현재까지 유지시켰으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에 훌륭한 기반이 되어 준 것이 개발 독재입니다. 이는 애초에 성장의 역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전후 한국 사회에 윤활유를 부어넣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IMF 이전까지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경제의 성장이 IMF 이전까지였다는 말은, 개발독재의 경제 성장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거기까지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IMF 이후부터는 그러한 정부 중심의 발전’, 혹은 수정자본주의적(혹은 케인즈주의) 발전양식 자체는 그리 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원료의 수입과 상품의 생산, 즉 수출지향 산업화로 인해, 국제정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수입대체 기간이 매우 짧은 편이었고, 또한 내수시장 자체가 매우 작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에 더 무게감을 두어야 하는 문제가 존재하죠. 하지만, 그런 만큼 오히려 더 인적자원에 투자하는 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장했던 나라는, 사실 대부분의 "late development" 국가들이 이에 속합니다. 물론 이들의 성장 방식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이들을 벤치마킹 하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 극단적인 사례일수도 있겠지만, 싱가포르가 그 예가 될 수 있겠죠. 물론, 극단적인 사례일 뿐입니다.

결국, 경제의 성장측면에만 집중한 덕분에, 경제의 발전자체에는 그리 큰 투자를 하지 못한 측면이 존재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이어오는 신자유주의(혹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로 여겨지는)로 인한 과도한 경쟁과 그에 대한 합리화(혹은 정당화)로 인해, 오히려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역량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의 역량이 감소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 빈부격차의 확대를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발전 없는 성장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부의 집중입니다. 부의 집중은 곧 빈곤의 보편화로 치환될 수 있고 말이죠. 이로 인해서, 현재는 경제가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안정적인 구조자체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더 이상 발전(심지어 성장조차도)하지 않고 유지되는 구조로 인하여, 결국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축소됩니다. 이는 사회적 자본의 감소로 연결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부를 수밖에 없죠.

또한, 사회가 성장하는 상황에서는 상관이 없겠지만, 현재와 같은 고착적인상황에 이른다면, 유동적인 상황에 대한 유기체적 대처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스펜서의 논의에서처럼, 사회의 분업화가 진행될수록, 환경에 대한 개인의 적응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구조에 약간이라도 변화가 일어난다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삶 자체가 무너지는 것과 동일한 상황을 겪게 되죠.

이러한 혼돈의 상황은, 결국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부르게 됩니다. 이는 결국 과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결국 사회적 갈등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이 등장하는 세대들은 과거 기득권층이 만들어놓은 불합리한 제도들을 개선해야지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중화학공업과 정부투자 일변도의 경제정책은, 현재 한국 사회, 심지어 세계정세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요.

이는 88만원 세대에서 선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연장입니다. 개발독재가 만들어냈던 안정성, 그 안정성의 가치를 거부하는 세대들에 의해서, 새로운 갈등의 요소로 변화합니다. 수치상의 성장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은, 교육받은 사람들, 최소한 자신들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시스템 자체의 적으로 만들어버리죠.

결국 과거 개발독재 상황에서는, 정부, 정부에 충성하는 기업, 노동자들 정도만으로 구성된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발전의 기회를 걷어차는형국이 됩니다. 엘리트에 대한 포섭이 점점 힘들어지고, 교육받지 못한(혹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한 계급배반만이 일어나며, 종국에는 그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사회적 신뢰도가 하락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 합의 구조의 부재에서 원인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군사독재의 잔재에서 출발한 신분제적인 사회 관념으로 인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공론장의 출현 자체가 불가능하게 됐죠. 그로 인해, 같은 계급(경제적 의미론만으로 따지자면) 내부에서조차 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각자가 경쟁 시스템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 하는 상황인데, 타인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이죠.

사람은 주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에 대해서는, 충분함 이상으로 잔인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합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혹은 주체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타자는 제거되어야(혹은 나에게 그대의 것을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주의적 경쟁체계로 인해 정당화됩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례를 가져와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 가난한 체대 학생 A가 있습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용역으로 일하며, 철거 현장이나 시위진압 등에 동원되기까지 하죠. 하지만 그나마 잘 살아 보기 위해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마련된 교회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로 일하고, 그 돈은 다시 헌금으로 바칩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 돈을 헌금하면, 결국 축복받아서 잘 살게 된다는 믿음이죠. 뭐 바치고 나면 주님이 다 채워 주시겠지.”라는 말로 그냥 넘겨버립니다.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다 그놈의 사탄의 자식들, 공산주의자 놈들이 문제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공산주의자들은, 시위하는 사람들이나, ‘장로 대통령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겠죠.

이는,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모두 하나의 타자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는 종교의 역할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비 기독교인들은 그에 대한 확신이 있을 리 없겠죠. 오히려 그런 인식 자체를 순진한생각으로 인식하여, 기독교인(혹은 보수적 정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들을 타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종교 또한 하나의 사회적 갈등 요소로 작용하게 되죠.

종교가 사회적 공론장이 아닌, 정치집단의 연장선상이 되는 것 또한, 개발독재시기에 살아남았던 보수적 기독교 종파들의 영향력이, 종교계에서 가장 강한(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규모 또한 가장 큰 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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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봄이 왔다기엔 아직 추웠던

그래도 강의실 안에선 따뜻했던

졸음 넘치는 시선들에 서 있던

답은커녕 질문조차 얻지 못했던

수그러진 고개 아래를 살피던

바람은 날개를 접었다. 아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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