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속담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사실 이는 대표적인 오역 중의 하나이다. 원어대로 번역하자면, “피할 수 있다면 전력으로 피하고, 정 불가능하다면, 흘려보내라.”


피할 수 없다고 즐기면, 그저 우리네 삶이 갈려나갈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이 갈려나가고 있다. 그 갈려나간 자리에 술을 부어 아프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해답일까. 우리의 이 고통들에 대하여, 누가 설명이 필요하다. 대체 왜 우리는 이따위로 고통스러운, 부조리한, 설명할 수 없는, 지금 여기에 지옥이 있는 삶을 쓸데없이 이어나가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디서 '평안'을 찾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찾고, 쿨한 것을 갈구하며, 새로운 것을 찾는다. 모든 논리는 단순하다, 단지 지금 여기만 아니라면, 지금 여기의 이 지옥만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 행복하리라는 믿음이다. 강신주를 좋아하는 것도, 종교적 인기를 얻는 것까지도, 결국 그 맥락이다. 지금 여기의 지옥, 모든 이들이 방황하며, 모든 단단한 것들이 표류하는 사회. 그 곳에서, “괜찮아”라는 말과 함께 "너는 올바른 것을 택하였다"라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다. 


정답만을 요구하는 사회, 하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바쁜 시대. 우리가 택한 것이 정답인지, 그에 대한 확신을 추구하지만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교회로 올 것이고, 어떤 이들은 강신주를 찾는다. 강신주는, 인문학은, 멘토들은, 베스트셀러 책장에 가득한 자기계발서들의 정답'들'의 담론투쟁은, 분명 평안을 제시하고 있다. 


강신주, 인문학, 인디, 홍대, 그 모든 '대안'들은, 삶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하는 '충만함'을 전제한다. 그 충만함의 크기만큼, 우리는 각자 삶 속의 고통들이 빠져나간 공허함이 있을 것이다. 그 자리를 채워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이를, 우리는 구세주로 모셨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 어떤 이에게는 강신주가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보다는 강신주가 훨씬 세련되고, 보편적이고,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다. 강신주라는 이름은, 소비자들에게도 권력이 된다. 


교회가 강신주와 동일한 정답만을 주려 한다면, 교회는 강신주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교회는 “너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와 “이 죄인아!”의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개인을 끝없이 낮추고,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일상의 용어로 번역돼서 보편적 ‘상품’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었다. 우리의 죄를 사하는 조건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 빚을 사함받는 조건은 이웃의 빚을 사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의 빚을 아무 이유없이 사해주어야 한다. 누가 보아도 오답인 선택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평등하며, 모든 이들의 선택이 그 자체로 옳다 인정된다. 거기에 정의가 있고, 하느님 나라의 공의가 있다. 하느님 나라는 거기에 있다. 천국은 분명 틀린 답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틀린 답이 아닌, 똑같은 정답을 제시하려 한다. 


예수는 분명 우리를 친구로 불렀는데, 우리는 그를 구세주의 자리로 올리고, 스스로는 한낱 노예의 자리로 내려가려 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자리로 내려 올 것이고, 함께 노예로서 서고, 걷고, 울고, 울부짖고, 아파하며, 통곡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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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아 혹시 인류학개론 들으신 분 있나요? 그럼 말이 편해지는데.. 없나요? 그냥 제가 설명할게요.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설명하고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비는 왜 옵니까? 그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고대에는 이런 과학적인 이론들을 아마 몰랐겠죠. 그래서 뭐.. 요정이 했다거나? 뭐 그런 설명들을 했겠죠. 바로 이거에요, 설명. 힌두 신화였나? 아무튼 거기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거대한 거북 위에 있다고. 누가 묻죠, 그럼 그 밑에는? 그래서 대답해요, 그 밑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고. 하지만 그 밑에의 밑에의 밑에는? 모르죠. 그 때 무한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무한히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우리에게는 세계이지만) 거북 한 마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말이죠. , 이 때 무한대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창세기, 혹은 태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베레시트와 정확히 동일한 이치죠. 사실, 아직도 창조론이 창조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논리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 존재했던 자들인가? 그럼, 이 모든 물질들의 태초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아 여기서 원래 '이집트 왕자' 장면 가져와야하는데.. 뭐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 장면입니다. 모세는 불꽃을 향해 물었죠, 당신은 누구냐고. 기독교의 신은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됐다는 것이죠.

빅뱅이론을 설명해볼게요.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물리학 지식이 필요합니다만.. 그냥 들으세요 뭐. 우주는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도플러 이론 정도는 아시죠? 그 기차 같은 거 지나갈 때 슈웅 하고 소리의 주파수가 바뀌는 거. 원리는 단순해요. 관측자에게로 다가오면서 생겨나는 음파는 주파수대가 점점 높아지고, 멀어질수록 주파수대는 낮아집니다. 여기서 주파수란, 파장의 진동수를 말하는 것쯤은 다 아시죠? 이러한 주파수의 변동 현상이, 우주에 있는 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일단 먼저, 빛은 파장의 성질을 가진 물질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어쨌든, 대략 50년 전쯤에 관측한 별빛의 주파수와 현재 관측하는 별빛의 주파수가 다른 것이 계속 관찰되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이렇게 우주가 계속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볼게요. 지금은 확장하는 우주니까, 축소하는 우주로 바꿔서요.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그니까 우주가 전혀 확장하기 이전, 우주의 모든 물질들이 하나의 이라 말할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 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태초에는, 우주 전체라는 엄청난 질량(혹은 에너지) 가 그런 작은 공간 안에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질량들의 균형이 무너지는사건이 일어나요. 그 때, 물질과 반물질이 떨어져 나가요. 그렇게 균형이 깨지며 동시에 대폭발, 즉 빅뱅이 일어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의 방법으로 등장한 이론들에는, 유신진화론, 지적설계론, 젊은 지구 창조론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의 대부분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죠.

먼저 유신진화론이란 최초의 빅뱅 자체에 신의 의지가 개입하였고, 그 후의 진화의 모든 형태가 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쪽에서 공식적으로인정하고 있으며, 그나마 가장 무난한 창조과학의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에 의해서도 될 수 있겠죠?

다음으로 지적설계론 이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정교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설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최신의 창조과학 쪽에서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구의 역사는 대략 5,000 년 정도인데 반해, 지질학 쪽에서 이야기하는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입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말이죠.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창조과학이란, 그저 졸렬한 타협의 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먼저 생각해봅시다, 과학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보편적인 증명이 가능한 이론들의 총합입니다. 그리고 창조론은,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하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는 가능할까요? 이에 대한 제 대답은, 공존은 가능하되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개신교에는 가톨릭과는 다른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주장했던 다섯 솔라 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라는 말인데요, 이 말인즉슨 모든 것은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신의 존재는 물론, 그분이 하신 모든 일까지 말이죠. 창조에 대한 것은 당연히 포함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론은 '믿는' 것이며, 창조과학은' 알고자 하는 시도' 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신앙에서는 'sola gratia' 라 말합니다. , 은혜가 없이는 알 수조차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심지어, 창조과학은 과학적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인지부조화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패러다임이요? 그들에게 창조과학이란, 신앙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평행선입니다. 절대 만날 리 없는 것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충돌할 이유도, 서로에 간섭할 권리도 없습니다. 창조론은 지식이 아니며, 진화론은 신앙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이런 젓가락과도 같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서로 충돌하면서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죠.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혹은 디도서 3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심지어 바로 다음 디도서 32절에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라는 말로써 '건전한 비판'마저 '비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신앙과의 연관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sola gratia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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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The main theme of my presentation is "Why christianity strong in Korea". Actually, my English skill is not enough to present my opinion or something. So I'm gonna do this presentation in Korean. I feel very sorry about this.

 아, 영어 문장은 여기가 끝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영어에 매우 약합니다. 그러므로 일단 발표는 한국어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발표는, 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강세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정확한 이론적 측면에 대해서는 매우 방대한 신학, 종교학적 자료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제 경험적 측면과, 기독교 내부에서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소개만 하려고 합니다.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 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구절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권위에 복종하라, 권위는 하나님께 로서 났나니”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아,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 이라고 합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Posted by 미노하
 이집트 왕자 시리즈의 세계에서는 신의 존재를 먼저 ‘참’으로 설정한다. 신은 존재하며, 그는 그의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나간다. 이는 헤겔이 말한 “인간의 역사는 신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이다.” 로 압축된다. 
 그 행할 일을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련시킨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던 요셉은, 믿었던 형들의 배신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한다. 거기서도 그나마 잘 할 수 있었던 일은 있었지만 어처구니없는 누명으로 인해 감옥생활을 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이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은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의 길을 이끄소서.” 이는 욥이 했던 고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라이기 어려운 말을 말하였나이다. 욥42:2~3]
 이집트 왕자에서의 신은 ‘모든 길을 내게 맡기라’ 라고 명령하고, 그에 따랐을 때 기적은 일어났다. (여담이지만, 이집트왕자 1 에서는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바다를 갈랐다) 그렇게 신 앞에 선 인간으로서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그의 길을 따랐을 때 회복은 일어났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형들마저 용서할 수 있었다.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 을 준다는 것, 즉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 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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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예배하라고 명령받은 것조차 우리를 위한 것? 너무 실존주의에 찌든 사상 아닌가? 왜 인간의 철학으로 신학을 분석해야 하는가? 게다가, 정말로 실존주의가 발전된 철학이라 할 수 있는가? 단순히 현대철학의 한 조류에 불과하지 않는가? 무조건 최근의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잖은가. 예배하라는 명령은, 애초에 우리의 창조 목적이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자유의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스스로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단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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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Here, I Am.
나는 여기에 (살아)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거 한 마디면 정리가 가능한 철학. 엄청나게 좁은 우리의 인지적 한계에 대해,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져 준다. 일단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지만, 이 철학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절망적인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 그렇다면, 일단 살고 보자. 일단, 도전하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나는 도전하고 죽겠다. 불가능이라고? 그딴 거 몰라. 일단 도전하고 보자.
 
"이 더러운 운명에, 나 스스로를 던진다!"
 
...까지가 이 철학ㅡ이라기보다는 윤리ㅡ의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다르다. 사고 과정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가지 더 큰 확신이 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구원 받은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실존주의자들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은, 바로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게다가, 한가지만 더 묻자. 정말 불가능한가? 1:60억 의 대결일 뿐인가?
 
아니다! 2:60억 이다!
 
그 '1' 이 더해진 것은 절대로 평범한 '1' 이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전능한 '1' 이 더해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이며,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관자가 되시는 '1' 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 이는 실존주의의 그 절망적인 확신 따위에는 비교도 안되는 진리이다.
 
그러한 우리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세상은 우리의 아래 있다.
 
도전하자!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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