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r His Glory/일상과 생각들'에 해당되는 글 18건

  1. 2014.04.07 부끄러워진 답, 기독교
  2. 2012.07.17 의로운 부자의 이야기
  3. 2011.08.29 찬양의 도구로서의 장비
  4. 2011.07.05 축복기도
  5. 2011.07.05 캠심방 기도문
  6. 2011.07.05 나? 나! 나...

어떤 속담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사실 이는 대표적인 오역 중의 하나이다. 원어대로 번역하자면, “피할 수 있다면 전력으로 피하고, 정 불가능하다면, 흘려보내라.”


피할 수 없다고 즐기면, 그저 우리네 삶이 갈려나갈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이 갈려나가고 있다. 그 갈려나간 자리에 술을 부어 아프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해답일까. 우리의 이 고통들에 대하여, 누가 설명이 필요하다. 대체 왜 우리는 이따위로 고통스러운, 부조리한, 설명할 수 없는, 지금 여기에 지옥이 있는 삶을 쓸데없이 이어나가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디서 '평안'을 찾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찾고, 쿨한 것을 갈구하며, 새로운 것을 찾는다. 모든 논리는 단순하다, 단지 지금 여기만 아니라면, 지금 여기의 이 지옥만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 행복하리라는 믿음이다. 강신주를 좋아하는 것도, 종교적 인기를 얻는 것까지도, 결국 그 맥락이다. 지금 여기의 지옥, 모든 이들이 방황하며, 모든 단단한 것들이 표류하는 사회. 그 곳에서, “괜찮아”라는 말과 함께 "너는 올바른 것을 택하였다"라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다. 


정답만을 요구하는 사회, 하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바쁜 시대. 우리가 택한 것이 정답인지, 그에 대한 확신을 추구하지만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교회로 올 것이고, 어떤 이들은 강신주를 찾는다. 강신주는, 인문학은, 멘토들은, 베스트셀러 책장에 가득한 자기계발서들의 정답'들'의 담론투쟁은, 분명 평안을 제시하고 있다. 


강신주, 인문학, 인디, 홍대, 그 모든 '대안'들은, 삶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하는 '충만함'을 전제한다. 그 충만함의 크기만큼, 우리는 각자 삶 속의 고통들이 빠져나간 공허함이 있을 것이다. 그 자리를 채워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이를, 우리는 구세주로 모셨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 어떤 이에게는 강신주가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보다는 강신주가 훨씬 세련되고, 보편적이고,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다. 강신주라는 이름은, 소비자들에게도 권력이 된다. 


교회가 강신주와 동일한 정답만을 주려 한다면, 교회는 강신주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교회는 “너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와 “이 죄인아!”의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개인을 끝없이 낮추고,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일상의 용어로 번역돼서 보편적 ‘상품’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었다. 우리의 죄를 사하는 조건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 빚을 사함받는 조건은 이웃의 빚을 사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의 빚을 아무 이유없이 사해주어야 한다. 누가 보아도 오답인 선택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평등하며, 모든 이들의 선택이 그 자체로 옳다 인정된다. 거기에 정의가 있고, 하느님 나라의 공의가 있다. 하느님 나라는 거기에 있다. 천국은 분명 틀린 답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틀린 답이 아닌, 똑같은 정답을 제시하려 한다. 


예수는 분명 우리를 친구로 불렀는데, 우리는 그를 구세주의 자리로 올리고, 스스로는 한낱 노예의 자리로 내려가려 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자리로 내려 올 것이고, 함께 노예로서 서고, 걷고, 울고, 울부짖고, 아파하며, 통곡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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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먼 옛날에 한 부자가 살았어요. 그 부자는 맘씨도 좋고, 주변에 베풀기도 잘하고, 심지어 신앙심까지 좋아서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죠. 하나님께 헌금도 엄청 많이 드리고, 아낌없이 내어 바쳤던 사람이었죠. 알콩달콩 살고 있는 부인도 있었고, 7남 3녀의 많은 자녀들도 있는, 너무나 화목한 집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자에게도 나쁜 일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어요. 들에 나가 일하던 자녀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죽었어요. 게다가, 자녀들이 관리하던 재산은, 천재지변이 닥쳐와서 모두 사라져 버렸죠. 게다가 맏형의 집에서 쉬고 있던 자녀들은, 그 집이 무너져 몰살당했죠. 이 모든 일들이 단 하루 만에 그 부자에게 전해진 소식이에요. 하지만 이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참 대단한 신앙이었어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온몸에 피부병이 걸려버렸어요. 온몸에 부스럼이 나고, 간지러워 긁으면 아프기만 한, 너무나 고통스러운 병이죠. 하지만 그래도 너무 간지러워서, 쓰레기 사이에 앉아서 벽돌로 몸을 긁고 있었죠. 그 때 그의 부인이 다가와 말했어요.


“당신이 그래도 당신의 믿음을 굳게 지켜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죠!”


“당신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들의 말과도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을 수 있지 않나요?”


이토록 그의 믿음은 굳건했어요. 그의 믿음을 지켜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 후 그의 친구들이, 그가 재앙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어요. 하지만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오랜 친구인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버린 모습에, 소리 질러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옷을 찢었죠.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땅의 모래와 먼지를 자신들의 머리에 뿌리고, 일주일동안이나 그의 곁에서 울고 있었죠.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그 부자(이제는 부자도 아닌)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어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의로운, 정말 지극히 선하고 의로운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련을 주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였죠.

그러자, 그의 친구들은 갑자기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네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지 않아?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네가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네게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 아닐까?”





...자 여기까지가 욥기의 절반의 내용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의로운 부자는 욥을 가리키죠. 뭐 그 주변이야 아직 나오기 전이니 별 상관 없겠죠. 나머지 내용은 요약하엔 내용이 너무 많으니 각자 읽어보세요. 42장을 요약하기엔 제 필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하나님은 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겝니다. 물론 욥의 말에도 동의하지 않으시지만, 결국 칭찬받는 것은 욥이죠. 신정론에 대해 매우 치밀하고도, 훌륭한 논리 구조를 가진 나름의 '신학 서적'이었던 욥기는,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유효하죠.


아래의 모든 말들은,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부정됩니다.

한 번 고민들 해봅시다.


'쓰나미를 당한 지방에는 죄가 만연하여서 주님이 벌하신 것이다'

'옷을 야하게 입고 다니면 성폭행을 당한다'

'네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성적이 낮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일단 너부터 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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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나에게 장비는 악기와도 같다. 카메라, 노트북, 연필, 심지어 핸드폰조차. 기타는 당연히 악기 아니더냐. 누군가는 그 악기들로 음악을 연주하며 즐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기뻐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극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여, 어떤 목표를 이루는 것뿐이다.

나는 장비들을 통해서, 주님의 피조물들을 담는다. 이미 주님의 영광은, 피조물 속에 모두 서려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그 영광들을 반사하여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은혜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악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음률에 섞여 있는 주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내고, 결국 주님께 기쁨이 되는 찬양을 드려야 한다. 사진도, 나 같은 글쟁이도, 다른 그 어떤 것도 동일하다.

내가 가진 장비들을 가리켜 '쓰레기'라고 칭하는 것은 좋다. 물론 그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다 해서, 나의 실력도 쓰레기인가? , '쓰레기'같은 장비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나의 실력은, 그 말에 도저히 반박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지금보다 더 좋은 장비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지금의 장비조차도 나에겐 버겁다. 물론 금전적 문제가 가장 큰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말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가난밖에 없다. 그것이 자랑이다. 나는 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들을 지금까지는 노력으로 메워왔다. 책을 사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도서관을 애용했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책을 한 번 더 읽는 길을 택했다. 대화할 이가 없었기 때문에 책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책이 나를 위해 대신 생각해 주었다. 그러한 지식조차 결국은 찬양의 도구이다.

나의 실력이, 그 어떤 것에 관한 실력이든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찬양에는 은혜를 담으려 노력한다.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찬양이라는 말에는, 사진, , 영상, 음향, 노래, 연주 등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비록 은혜를 담기엔 많이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은혜가 담기는 순간은 많다. 이는 나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쓰고자 작정하고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맨 처음 뮤지컬 대본 작업을 시작했던 것도, 그저 시켜서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제, 나의 만년필은 찬양의 한 도구가 되어 있다.

나는 주님의 피조물을, 악기를 통해 담는다. 그 악기가 뭐가 됐든 좋다. 악기는 찬양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으로 내려온다면, 몸을 악기로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래서 춤을 통해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참 많이 부럽다. 나는 뭐 하고 있는가. 멀쩡한 몸을 두고, 춤을 통해서도 찬양할 수 있거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춤을 추지 않는 것은, 멀쩡한 장비를 쓸 줄 모른다고 내버려두는 안타까움과 같다. 게다가 몸이란, 입으로 하는 찬양과 더불어 최고의 장비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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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당신이 하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선택하셨습니다. 즉, 당신이 구원받았다고 인정해서 구원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당신을 향한 구원의 계획을 가지고 계셨기에 당신이 구원받은 것입니다. 당신이 할 것은 단 한 가지, 그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앎으로서 증명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믿는 것입니다.
 세상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수많은 시도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 반대의 시도는 더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을 믿는 자들의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전혀 다른 영역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앎은 흔들릴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신앙까지 흔들린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류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영적인 것입니다. 우리는 영과 육을 둘 다 가진 존재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인하여 영이 육에 지배당하지 않습니다. 
 지금 당장에는 당신을 향한 많은 비난들이 있을 것입니다. 스스로의 삶조차도 너무나 부족해서, 너무 쉽게 흔들리고 넘어져서, 너무 죄가 커서 세상 앞에조차 당당하지 못한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삶이 너무 부족해서, 찬양조차 온전히 드릴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워지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온다는 것조차 힘들어져서, 주님 앞에 나아와 눈물을 흘리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할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그런 당신을 사랑하셨음을. 주께서는 그런 당신조차 사랑하셔서 이 땅에 내려오셨으며 그 모든 고통을 감당하셨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그러한 심령의 가난함을 기뻐하시며, 그러한 영혼에게 위로함을 주십니다. 그러한 영혼을 자유롭게 하실 것입니다. 진정으로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하실 주님이십니다.
 매일이 너무 견디기 힘들 정도로 지루하고, 자신의 삶에서 어떠한 의미도 발견할 수 없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단지 일상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는 삶으로 인해, 그 삶에서 복음을 전하는 것조차 자신에게는 무리라고 느껴질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하루하루가 변화가 없고 그 순간들 가운데 아무 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에게 무력감만 느껴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인생을 낭비하는 것으로만 느껴질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순간에 함께하심을. 당신이 무력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에, 주께서 일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지금-여기에 주께서 능력으로 임재하실 것입니다. 당신에게 능력을 더하시며, 그 의미 없어 보이는 하루하루로 인하여 주님께 영광이 되는 삶을 살게 하실 것입니다. 당신이 그 삶을 살아간다는 것 하나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파할 수 있는 능력이 당신의 삶에 함께할 것입니다.
 세상에 복된 소리를 들고 나아갔지만 경멸 이상의 대우는 기대할 수 없는 경우가 많을 것입니다. 가던 길이 너무나 좁아져서, 눈앞의 한 걸음 말고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을 것입니다. 자신의 그 좁은 길에는 주님조차 함께하실 수 없다고 느껴질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아 당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순간이 있을 것입니다.
 그 때에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당신의 앞에서 걸어가십니다. 당신의 바로 한 걸음 앞에서, 당신의 길을 비추고 계십니다. 한 걸음 앞에서 걸어가시며, 당신의 모든 것을 체휼하시고, 공감하시는 분이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은 주님과 동행하고 계심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주께서 왜 당신의 모든 것을 체휼하셨고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기다리시는지,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나, 이렇게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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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사랑의 하나님 감사합니다. 
 우리 부족한 자들이 이 자리에 모여서, 주님을 예배하고자 합니다. 두세 사람이 주의 이름으로 모인 곳에 주께서 함께 계시겠다고 하셨으니, 이 자리에도 주님의 영광으로 임재 하옵소서. 우리가 한마음 한뜻으로 예배할 때에, 주께서 하늘에서 보시고 응답하시어, 성령의 빛으로 비추어 주옵소서.
 주님, 우리에게 주어진 각자의 삶의 자리들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너무나도 많은 일들을 봅니다. 그리고 그 많은 일들에 눈이 멀어, 주님을 보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주님이 명하신 길로 갔다고, 가겠다고 늘 생각하고 다짐하면서도, 우리의 길에서는 주님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죄를 용서하옵소서. 주여, 우리의 연약함을 보시고,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지금은 말세의 때입니다. 비극은 일상이 되었고, 복음은 경멸을 받으며, 농담거리로도 지루해진 시절입니다. 삶은 슬픔이 되었고, 축복조차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이 어두워진 세상에 빛은 보이지 않고, 이렇게 익숙해져버린 어두움은 우리의 죄악마저 감추어 버렸습니다. 주님의 백성인 우리가, 맛을 잃은 소금이 되어 버렸습니다. 
 주님, 우리가 다시 한 번 세상을 위해 일어나는 사람들이 되게 하옵소서. 웅크리고 있던 어둠에서 나와, 세상가운데에 주님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우리 비록 부족합니다. 길을 잃는 순간도 많고, 주님을 놓치는 순간도 많사오나, 그래도 주님은 우리를 놓지 마옵소서. 우리가 호흡하는 공기보다, 살아온, 사는, 살아갈 이 세상보다 크신 주님을 의지하며, 그렇게 나아가게 하옵소서. 다시 한 번 그렇게, 복음의 빛을 전하게 하소서.
 주님만 의지하옵고, 모든 것 감사드리오며, 우리를 죽기까지 사랑하사 모든 것을 내어 놓아 우리를 구원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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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친구,

아들,

선배,

후배,

아직은 저기수 형제,

콰이어팀,

방송부원,

아는사람,

09학번 신입,

잉여노동력

 

의 내가 있지만,


어딘가에는

나로서의 나도 있었으면 한다.

바람 한 점에도 부끄러워했던

어떤 이와는 다르다.


그냥 생각대로 하라고?

그게 망나니지 뭐냐.

그런데

난 차라리 망나니가 되고 싶었다.

 

세상은 아직 어둡기만 하고

나도 아직 작기만 하다.

 

한때는 찬양으로 가득한 마음이었지만

이제는 공허로도 다 채우지 못하는

 

미친 좌절만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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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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