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디오진크라지'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19 이주자에 대한 시선 : 무너지는 주체와 타자의 경계
  2. 2011.07.17 정치학개론 독후감

이 글은, Do immigrants threaten the national culture and identity? 란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일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동정심이나 통계학적 의미로써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집단 내부의 다양성은 증가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은, 물론 이전의 그 무엇과는 다를 것이다. 쉽게 생각하자, 변화는 변화를 부른다. 큰 변화에서 작은 변화이든, 작은 변화에서 큰 변화이든. 이주자들의 수는 분명 증가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 대한 문화의 변화도(외형적이든 내형적이든)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인식은 어떠한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흑인이나 짙은 황인 계열의) 길을 물어오는데,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런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무엇이겠는가? 물론 자신이 아는 언어(한국어나 혹은 영어라도)라면 친절하게 답을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이 사람들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도망일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두려움에 기인한,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은 두려움이 가장 보편적이다. 물론 그러한 감정을 즐기는 많은 모험심 넘치는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많은 소수중 하나일 뿐이다. 대부분의 적은 다수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무지에 대한 공포는 기본적인 생존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그러한 행동을 백안시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집단적인 공포로 확대하여 하나의 진실이며 순리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문제일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는, 조금만 과거로 올라가서 2차 대전 시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당시 독일의 경우, 1차 대전 패배의 경험과 그로 인한 배상금 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부담감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려한 영광의 시절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으며, 의견 통일은커녕 국가 관념조차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삶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히틀러라는 영웅이 등장하였고, 괴벨스의 언어를 통하여 대중을 휘어잡았다. , 난세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일어날 만한 원동력이 필요하였다. 꼭 실제적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민족이었다. “아리안족은 위대하다.” 라는 명제는 꼭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민족이 실재하는가? 알 필요 없다. 그들을 위대하지 않게만든 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그것은 유대인이었고, 3세계에 대한 착취를 통해 힘을 키운 타 유럽 민족들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인들은 목표 의식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 대중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은 100%의 진리가 아닌, 1%의 진실이니까. 그들에게는 단지 적이 필요했고, 그 훌륭한 대상으로서 선택된 것이 언제나 유럽인의 적이었던유대인이었을 뿐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이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가? 민족이라는 관념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자본가들의 필요성에 의해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근대적 국가가 나타났고,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을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 민족은 단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밈meme일 뿐이며,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민족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가까운 과거에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아직도 IMF 의 상처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수많은 청년 실업자들은 표류하는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조하며,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은커녕 주류에 편입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청년 세대뿐만 아니라, 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안정감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이러한 상황들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책임 추궁에 대해서, 언론과 대기업 등의 엘리트 집단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을 달랠 만한 당근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공격성은, 우리 주변의 많은 소수자를 향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위험하다.

이제 다시 한 번 결론을 지어 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위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변화에 대한 공포는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위협으로 표현하며 무조건 거부하려고만 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광기의 한 형태일 뿐이다.

과학이 계몽시킨 전근대 사회는, 다시 한 번 과학 자체가 이 되었다. 그렇게 근대는 계몽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계몽은 일어나지 않았고, 민중은 편한 마음으로 폭력을 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이루어지는, 통계와 이론으로 정밀하게 계산된, 폭력이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 외국의 문화가 유입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순수성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협으로 느끼는 것. 그러한 생각 자체가 바로 폭력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힘이 국가의 통제력 수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주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문화는 사람이 옮기는 것이므로, 이주에 의한 문화 변화가 매우 클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한 현상은 멀게는 기자 조선이 그러하였고(기자조선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가 그러하였다.

그렇게 문화는 변한다. 변한다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증가는, 분명 좋은 점이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이며 변동이고, 결국 그것은 어떤 면에선 기회로서 주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두려움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미노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물었을 때, 대부분의 동양인이라면 네 앞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학교도서관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인(혹은 서구의 철학에게 묻는다면)이라면 어떠한가? 아마도 지금, 여기에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여기. 혹은 Now-Here.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멀리는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가깝게는 우리네 영화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명령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물론 이 두 개의 구절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곧 비서구 문화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여기에, 기독교와는 다른 방향이지만, 다위니즘이 섞인다면 이는 어긋난 동정심으로 작용하게 된다.

산업혁명기, 자국 내의 발달이 극에 이르러 새로운 소비 시장이 필요해진 서유럽의 국가들은,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세계에 나갔을 때 보았던 것은, 충격의 장면 들이었다. 자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비서구인의 생활양식. 너무나 불결하며’, ‘비참하고’, ‘가난한그네들의 삶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일명 백인의 의무라는 것을 앞세워 좀 더 진화한 우리들이 진화하지 못한 비 백인들을 구제해야 한다.” 하는 인도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은 환경결정론, 문화 진화론, 문명 등의 용어로 대체되어, 비서구 사회를 개척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좋은 환경은 좋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이 생긴다. 그것이 개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열등한문화를 가지고 있을 자들을 위해, ‘우수한환경에서 우수한 문명을 전해주러 가는 것이다. 물론, 대포와 기병을 앞세우고. 뭐 거기서 경제적 부가 창출된다면 그건 당연한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러한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문명에는 우열이 없다. 아니,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문명이라는 말은 없다. 야만인(barbaric)도 없다.

서구인들이 비 서구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하나둘 믿지 못할 발견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이미놀라운 문명이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가 더 열등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라미드가 있었다,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담긴. 거대 고산 도시가 있었다, 자신들도 실행할 수 없었던 복지 사회의 정신으로 세워진. 조금 더 고산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기원전에 세워진 그 도시에는, 엘리베이터와 상·하수도, 3~4층의 아파트가 있는 계획도시였다.

물론 이러한 것은 나중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두 권의 책에서는, 아직 제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근대화라는 환상이, 환상이 아닌 현실로서 살아 숨 쉬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매우 훌륭한 지지(地誌)서이다. 당대 한국의 상황에 대한 현대사적 서술은, 식민지로서의 한국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이 묘사하고 있다(물론 당시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관찰하는 꽤나 객관적인 시선은 한국 사회를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사실은 우리나라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라는 것이다. 한국은 과연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할 정도로가난했다. 국민들은 순박하기만 했고, 부정부패와 수탈로 인하여, 피착취 계급은 근면의 목적조차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소독과 같은 의료적 지식은커녕 기본적인 위생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 관료들은 행정적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척도로 평가받았고, 엽관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자발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습의 폐단은 영원한 어제속에 갇혀서 변동의 가능성조차 차단해 버렸다.

여기까지가 이사벨라(혹은 대부분의 서양 학자들)의 관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조금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개방성이라는 사상은 조선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모내기법의 확대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농민들은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서는 돈을 먼저 지불하고 물품을 주문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광산은 민영으로 운영되었고,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시장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고, 동전 화폐뿐만 아니라 신용 화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거기까지였다. 비변사의 너무나 막강한 권한과 함께, 세도 정치로 인해 생겨난 귀족 계급은 상업 자본의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일본은 이미 서구의 문물을 (외형상으로는)완전히 받아들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사상마저 그들의 스승(영국)에게 잘 받아들인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정하기 힘든 학문적 정론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쉽게 쓰이는 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식민지가 되었던 덕분에근대화가 된 것이 아니다. 다만, 식민지 형태로근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한국의 경제적근대화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한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국가인가? 아니, 정말 근대화란 좋은 것인가?

여기서 일그러진 근대를 보자. 일본은 매우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개방성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다른 문화가 일본에 들어올 경우, 일본은 그것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자기화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섬이라는 특성으로 인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방이라 볼 수 있다.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국가라는 사실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근대화(혹은 서양화)되지 못했다. 한국인에 대한 가혹한 식민 정치나, 경찰 권력의 폭력성 등은 서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서구 국가에서는 이들을 보고 그래봤자 야만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의견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필자가 한번 물어보겠다, 한국은 과연 근대화된 국가인가? 서양은 진정으로 근대화되었는가? 필자는 근대화를 이렇게 규정해보겠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사회의 보편적인 담론을 구성하는 것.” 이렇게 본다면, 아직도 한국에서는, 아니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진정으로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오리엔탈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언어를 사용한 비판이다. 비판을 통해서 상대와 나를 구별 짓는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나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분명 생존의 논리이다. 타자들도 분명히 살려줘!” 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체가 먼저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들도 외치고 있다, “살려줘!” 라고. , 그대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일단 쏘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것이다.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스타에서 미네랄 캘 때 죄책감을 느낄 리는 없다.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끼는가? 만약 그대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주체이다.

다만 그 생존의 논리가 정치적 논리로 확대되어 오용될 경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일본에 대한 야만적이라는 비판은 일본마저도 아시아의 국가임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담론을 낳았다. 이러한 것은 당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싶다. 이 무슨 마초스러운 발언인가. 그렇다면 서양은 남성이고 동양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뜻인가? 저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저 문장이 바로 남성주의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의 결정체이다. 서양인에게 있어, 동양은 신비로움과 부드러움, 보물들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인은 동양인들을 계몽하고 다스리며 복속시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성, 그렇게 다시 계몽의 목표물이 되었다. 이제 다시 계몽을 계몽시켜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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