뭐라 해야 할까? 시각장애인을 묘사한 영화다보니, 그에 대하 연출 측면의 완성도는 미친듯이 높다. 물론 영화란 놈 자체가 매우 높은 수준의 시각적 집중도를 보이긴 한다. 그런 매체적 특징으로, 시각이 없는 사람의 입장을 서술한다는 것은, 상상력 이상의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문맹자가 주인공인 소설 이상의 상상력이 필요한 곳이 바로 이런 류의 영화이다.
이것을 연출자(혹은 감독)은, 음향에 대한 미칠듯한 집착으로 이루어낸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음향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5.1채널 혹은 그 이상의 기법이 등장하고 또 활용되지만, 시각 속에 짓눌려서 그저 장판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음향효과가 묘사의 주역으로 활용된다. 
1인칭 시점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녹음법은, 음향을 통해서 관객이 함께 음원의 방향을 ‘추적’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지하철, 발자국 소리, 옷과 관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그리고 그런 소리들의 절정은, 마지막 비가 오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빗소리는 모든 방향에서 다르게 들린다. 이것은 일종의 화이트노이즈와도 같다. 다른 영화들에서 빗소리가 녹음되는 경우, 그냥 ‘빗소리’로만 들린다. 단지 소리로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소리 이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여러 개의 스피커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행한 녹음을 통하여, 그 공간에서 날 법한 빗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요약 : 음향덕후에게 이 영화 강추
Posted by 미노하
 이집트 왕자 시리즈의 세계에서는 신의 존재를 먼저 ‘참’으로 설정한다. 신은 존재하며, 그는 그의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나간다. 이는 헤겔이 말한 “인간의 역사는 신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이다.” 로 압축된다. 
 그 행할 일을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련시킨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던 요셉은, 믿었던 형들의 배신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한다. 거기서도 그나마 잘 할 수 있었던 일은 있었지만 어처구니없는 누명으로 인해 감옥생활을 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이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은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의 길을 이끄소서.” 이는 욥이 했던 고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라이기 어려운 말을 말하였나이다. 욥42:2~3]
 이집트 왕자에서의 신은 ‘모든 길을 내게 맡기라’ 라고 명령하고, 그에 따랐을 때 기적은 일어났다. (여담이지만, 이집트왕자 1 에서는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바다를 갈랐다) 그렇게 신 앞에 선 인간으로서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그의 길을 따랐을 때 회복은 일어났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형들마저 용서할 수 있었다.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 을 준다는 것, 즉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 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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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
모큐멘터리
mockumentary는  mock 과 documentary 를 합쳐서 만든 단어인데, mock의 뜻에는 '가장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조롱하다'라는 뜻도 있다. 다른 말로 fake documentary 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어설명 : 네이버 백과사전)

 영화 얘기한답시고 글을 쓰기 시작해놓곤 갑자기 왜 듣도 보도 못한 용어 설명하고 있냐고? 잘 읽어 놔.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야.
 다큐멘터리는 일반적으로 ‘사실’의 기록을 의미해. 하지만 그 기록이 정말 주관성이 배제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주관성이 흐르고 넘쳐 마르지 않는 샘이거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성이 담긴 행위야. 편집을 했든 안했든. 이런 현상을 아예 대놓고 비꼰 게 바로 모큐멘터리야. 다큐멘터리의 형식만 가져온 것일 뿐 주제 자체는 허구인 거지. 이 영화는 모큐멘터리의 정말 훌륭한 사례야. 외계인이라는 허구적인 소재에, ‘만약?’이라는 잣대를 가져와 ‘비웃자는’ 영화니까. 잠시 후 말하겠지만, 여기서 외계인을 흑인으로 바꾸어 버리면, 이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니까 더더욱 모큐멘터리임이 빛을 발하지. 게다가 다큐멘터리의 형식인 만큼 ‘아 진짜 이렇 수도 있겠다...’ 싶어.
 영화는 끊임없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어. 당연히 주체는 인간이었지. 그런데 정작 관심과 시선은 타자를 향하고 있어.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억압받는 타자가 주인공인 거지.
 아 먼저, 주체란 ‘나 혹은 우리’ 를 뜻하고, 타자는 ‘너, 너희, 그, 그들’ 등을 의미해.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거야.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겠지.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그 본능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들어. 즉,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지.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이 위에 설명한 ‘격리’ 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에는 격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 이로써,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되지.
 영화는 여기서 다시 ‘만약?’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바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자야. 이건 뭐 거의 ‘에반게리온’ 에서 ‘롱귀누스의 창’ 같은 존재야.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존재. 그런데 그는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해. 이카로스의 욕심에 묻혀버리지. 여기서 모큐멘터리의 아이러니는 빛을 발하지.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악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와, 정말 ‘인간적’이고 선한 외계인들. 이것을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빌려 매우 강한 설득력으로 뇌리에 심어놓지. 영화는, 타자의 외침을 끊임없이 전달해. “살려줘!”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해.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주체들도 외치고 있어, “살려줘!” 라고. 자, 네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쩔 거야? 일단 살기 위해 쏘겠지. 그들도 똑같아. 살기 위해 타자를 억압하고, 죽이고, 실험하지. 그것이 ‘좀 더’ 라는 말이 생략될 수 없기에 천인공노할 짓거리가 되겠지만. 뭐 그럼 어때, 타자는 ‘실존’ 하는 존재가 아닌걸. 타자는 단지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야. 스타에서 미네랄 캐면서 죄의식 느껴본 적 있어?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껴? 만약 네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 거야. 그것이 바로 주체야.
 그런데 그렇게 ‘든든한’ 주체와 객체의 벽을 허무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었던 거지. 하이브리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이브리드. 너무나 바보 같고 착하고 정말 인간적인 욕심밖에 지니지 않았던 하이브리드.
 
총평

잡설이 좀 길었는데... 이 영화가 워낙 메시지가 세다 보니까 그려. 추천할 만하냐고? 아니. 역시나 이 영화는 잔인함 이전에 그 메시지 자체만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야. 인문학도라면 강추 이상으로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지만, 그 외에는... 글쎄...
 
추신
 
주인공이 넘흐 착하잖어ㅠㅠ 비커스 바보!!
Posted by 미노하











아무 것도 가진 것 없고,

권력이나 힘은 기대조차 않고,
지갑에 차비는커녕,
돌아갈 집조차 없을지라도,
주님이 동행하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담대할 수 있는 능력.
 
아무 것도 없어 쓰러지는 것이 아닌,
그 가벼움으로써 비상하는 날개.
Posted by 미노하
 1982년, 베트남전의 패배와 오일쇼크 등으로 인한 사회 혼란이 아직 진정되지 않은 시기였다. 그때, 절대적 가치의 붕괴를 모토로 삼은 ‘포스트모던’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레이건에 의한 ‘강한 미국’의 재정립이 추구되며 보수주의가 다시 떠오르기 시작할 시기였다. 당시의 시대상을 SF로 치환하여 잘 표현해낸 디스토피아 영화가 바로 이 영화, ‘블레이드 러너’이다. 이 영화는 많은 것을 담고 있지만, 모든 영화가 그렇듯이 절대로 친절하게 설명해주지 않는다. 소화되지 않게 보여주고 넘어간 후, 남은 모든 것을 독자에게 맡겨 버린다. 나는 이 영화에서 제시한 것들에 대해 해체해보고 분석하여 나의 언어로 설명해보려 한다. 
 처음부터 밤에서 시작하여 ELS로 보여주는 대지에는, 어두운 하늘로 향하는 굴뚝의 불꽃만이 보인다. 피라미드의 형태로 지어진 건물은 신에게 도전하는 바벨탑과도 같다. 이 건물의 안에서는 신에게 도전하는 것과 같은 ‘인간을 만드는 일’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여담이지만, 이는 가타카에서 간접적인 오마쥬로 나타나기도 하는데, 가타카에서는 아예 처음부터 성경 구절을 제시한다. 도시의 건물들은 이미 국적을 알 수 없다. 절대적 기준은 이미 사라진지 오래이다. 도시의 차이나타운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도 당시 이민자들에 대한 불안감이 영화에 시각화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퇴폐적 분위기가 만개한 도시(게다가 거의 항상 비가 내린다, 느와르의 컨벤션은 비오는 거리)는 핸드헬드 기법과 로우키 조명에 의해 표현된다. 9분할 구도는 명확하게 지켜지지만, 일부러 그것을 깨기도 한다. 매우 많은 부분을 느와르에서 가져왔다고 해도, 변명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 곳에 존재하는 블레이드 러너, 느와르에서 수사관의 역할을 수행하는 존재이다. 그들은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로봇들에 대한 처형 ― 영화상에서는 ‘폐기’라고 부른다 ― 임무를 가지고 있다. 이는 과거 매카시즘의 신봉자였던 정보기관에 대한 오마쥬라고 할 수 있겠다. 자신의 방식이 옳다고 철저하게 믿으며, 도망치는 무력한 여자에게 등 뒤에서 총을 쏘기까지 하는 임무수행. 하지만 피해자는 인간이 아닌 로봇이기에 어떠한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아니,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이는 ‘외계인=공산주의’ 의 공식을 가지고 있는 SF 호러 영화의 요소를 찾아볼 수 있겠다. 공산주의에 대한 ‘믿지 못함, 적대감, 두려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영화로 표출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를 보는 동안 많은 곳에서 기회와 모험의 땅에서 새시작하라는 광고판이 하늘을 떠다닌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과 관련지어지지 못한다. 높은 곳에서 그것이 빛나고 있으며 때때로 주인공들을 비추기도 하지만, 그것은 딴 동네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도 그러한 밝은 존재와는 어울리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비상식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블레이드 러너. 인간이 아닌 로봇들. 어두운 곳 ― 흡사 시궁창을 연상하게 하는 ― 곳에서 캐릭터들은 그것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그것에 큰 관심을 주지 않으며, 순간순간의 생존이 더 중요할 뿐이다. 앞서 말했듯이, 희망은 없다. 
 중간 중간 많은 소품을 활용하여 영화상의 의미를 강조하는 기법을 사용하는데, 이는 몽타주 기법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만이 꾸었던 꿈을 다른 형사가 알아내는 것으로 마무리한다. 그것을 암시하는 것은 유니콘의 조그만 모형. 어떻게 보면 그냥 지나칠 수도 있는 오브제이지만, 줌인 기법을 활용하여 영상의 심도를 매우 얕게 한 화면에서의 그 모형은, 매우 큰 충격으로 다가오게 된다. 
 또한 로봇으로서 캐릭터의 얼굴을 화면에 가득 채워서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계속 강조한다. 하지만 오히려 진짜 인간들의 감정에 대해서는 어떠한 강조도 보이지 않는다. 때때로, 그들의 얼굴은 화면에서 표시되지 않기도 한다. 얼굴이 인간이라는 존재의 감정을 가장 잘 표현하는 도구이지만, 그것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인간의 기계 같은 속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로봇들은 울고 웃지만, 정작 인간으로 나온 사람들은 절대로 감정을 내비치지 않는다. 심지어 얼굴이 화면에 나오는 장면이 충분히 있다고 할지라도. 이쯤 되면 인간과 로봇의 구별이 가지 않는다. 로봇이 인간의 감정을 더 풍부하게 나타내고 있으며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존재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SF영화는 많은 요소를 호러 영화에서 가져온다. 이 영화에서도 많이 나타나는데, 누군가에게는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인형들이 주인공에게는 공포로 비춰지는 것이 그 예이다. 또한 총을 맞은 여자 로봇은 미친 듯이 발버둥 친다. 그 기괴함은 영화를 도저히 편하게 받아들일 수 없게 한다. 쫓기는 장면에서는 많은 장면을 하이 앵글로 처리하여 주인공의 무력감을 강조한다. 영화 초반부에 로우앵글로 주인공을 보여주고, 로봇들을 하이앵글로 보여주던 것과는 정반대이다. 사냥을 하던 존재가 사냥감으로 전락하는 것을 대사뿐만 아니라 영상 구도로써도 표현하는 것이다. 
 너무 많은 것을 제시하고, 너무 시대를 앞서나가서, ‘몰락한 영화’라 칭해지는 블레이드 러너. 이 영화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영화의 배경은 2019년, 당시 영화가 제작될 시기로서는 상당히 먼 미래였다. 그리고 그 미래에서 그들은 ‘절망’을 보았다. 미래 어떠한 곳에서도 희망 따윈 없었다. 느와르의 특성을 강하게 비추는 이 영화는 가장 밝은 빛으로써 황혼의 태양빛을 준다. 인간으로 존재하기 위한 조건은 무엇인가. 이 영화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것에 대한 ‘실존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리고 어떠한 해답도 제시하지 않은 채 영화는 끝나버린다. 영화는 끝이 났지만 많은 매듭이 아직 풀리지 않았다. 이는 무엇보다도 필자의 역량의 한계가 더 크다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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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가 되어 버리는 삶.
하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는 절대자의 지배를 벗어난다.
그리고 스스로 시련의 길, 불확실한 길을 택한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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