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main theme of my presentation is "Why christianity strong in Korea". Actually, my English skill is not enough to present my opinion or something. So I'm gonna do this presentation in Korean. I feel very sorry about this.

 아, 영어 문장은 여기가 끝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영어에 매우 약합니다. 그러므로 일단 발표는 한국어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발표는, 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강세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정확한 이론적 측면에 대해서는 매우 방대한 신학, 종교학적 자료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제 경험적 측면과, 기독교 내부에서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소개만 하려고 합니다.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 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구절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권위에 복종하라, 권위는 하나님께 로서 났나니”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아,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 이라고 합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Posted by 미노하

한걸음 다가가 서 본다.


그렇게 멀어져가지만,

그렇게 멀어져가지만,

이 하나가 둘이 되기를

그렇게 희망하여 본다.


하늘을 보았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 거울 속에 비친,

그대의 모습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그렇게 눈을 감아

그리어본다.


그렇게 모두 사라져가고

이제 남은 한줄기 빛망울

방울방울 떨어져 내리지만

나 이렇게 갈길 잃은 채,


한걸음 뒤로 물러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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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한걸음

빛이 보였다.

그렇게 한걸음 더

보이지 않아,

그 얼굴이, 웃음이, 웃음소리도,

보이지 않아,

물러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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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오늘도 내일도 어제마저도
그릴 수 있는
그런 그대가 있다는 사실로
하루하루 힘겹고
희망은커녕 절망조차 보이지 않는
그 어둠 속에서라도
혼자이기에
그 고독으로 인하여 더욱더
그대를 볼 수 있기에
보이지 않음으로 더욱
행복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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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이전에 88만원 세대라는 책이 한국에 출판되어, 엄청난 수준의 영향력을 미친 적이 있었다. 그 책에 대한 찬성이든 반대든, ‘88만원’ 이라는 말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함의를 무시하진 못할 것이다. 
그 책에서는, 현재 노동 시장에 진입하는 젊은이들은, 인턴이나 아르바이트, 즉 비정규직이라는 불완전한 형태로 노동 시장에 편입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이 말인즉슨, 기존의 부르주아-프롤레타리아의 착취 체계가, 세대 간 착취 체계로 변환된다는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20(혹은 30대 초반까지도)대는 무기력을 떨치고 일어나 기존의 기득권 세력을 향해서 ‘바리케이드를 치고 짱돌을 던져야’한다고 말한다. 
그 내용은 어찌되었든 간에, 그 책을 쓴 사람의 ‘사회-경제적 위치(socio-economic status)는, 88만원 세대가 아니다. 결국, 그들 자신들이 맞다 생각하는 사상을, 지금의 청년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거기서 현재의 사회를 분석하고 있는 내용은, 많은 청년들이 공감하고, 또 경험하고 있는 ’사실‘들이다. 하지만 주장의 경우는? 그 자신의 위치에서 그리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무한도전 서해안고속도로 가요제 특집편 엔딩 부분에서, 유재석과 이적이 불렀던 “말하는 대로”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다. 지금의 청년들을 향해서 “힘내라!”라고 말해준다고 느끼는 것이다. 물론, 필자도 처음 그 영상을 보았을 때는, 그 노래에 담긴 진정성을 보았고, 또 감동을 느꼈다. 그런 만큼, 특히 무한도전이라는 프로그램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그 안에 담긴 이데올로기적 꾸중을 그저 넘어갈 수 없다. 
말하는 대로, 너희들이 생각하는 대로 계속 살기 때문에, 너희들의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희망적인 생각을 가져라. 노력하라. 최선을 다하라. ‘내일 뭐 해야지’라고 말하라. 그렇게 너희들의 삶은 변할 것이다. 이루어 낼 것이다. 너희는 끝내 승리할 것이다. 꿈을 꾸라. 
그리고 세대론을 들은 학생으로서의 입장은, 그것에 던져줄 수 있는 것은, 화환이나 박수 따위가 아닌, 비웃음일 뿐이다. 그 노래에 담긴, 영웅적 세대의 꾸중의 이중주. 우리의 절망을 우시 스스로에게로 돌리는 그 가식. 첫 번째 보았을 때는 감동이었을지 몰라도, 다음번에 볼 때의 그 영상은, 안타까움 이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어두운 시대이다. 앞이 보이지 않는다. 앞을 보기는커녕, 내일을 생각하기는커녕, 그렇 시간조차 없다. 내일 뭐 할지는 결정되어있다. 알바를 나가든지, 도서관에 처박히든지, 운이 좋다면야 주말이니까 좀 쉬는 정도이다. 우리들은 잉여가 아니다. 주변에서, 사람들이, 심지어 무한도전 같은 대형 프로그램에서조차, 우리들을 향해서 잉여라 말하고 있다. 
프로그램 스스로 ‘대한민국 평균’의 방송인들이 나와서 예능을 보여준다고 말한다. 그 말인즉슨, 프로그램의 시청자들, 그 프로그램에 담긴 정치적 함의를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사람들은 ‘평균 이상’이라고 치켜세운다. 그렇기 때문에, 평균 이상인 우리네 대학생들, 혹은 ‘말하는 대로’에서 과거의 자신, 즉 지금의 20대를 향해서 ‘힘내라’고 말할 수 있다. 평균 이상의 사람이기 때문에, 최소한 자신들보다는 나은 사람들이기 때문에, 너희들은 승리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말조차 절망적으로 내뱉지 말라는 그런 잔인한 선언을, 노래를 통해서, 화려함을 통해서, 자본을 통해서, 눈물과, 진정성과, 심지어 청년들 스스로를 통해서 만들어내고 있다. 스스로의 눈, 방송인 유재석의 눈으로 세상을 보라는 ‘명령(권고라고 해도 좋다)’을, 그에 담긴 잔인함을,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를 향해 찔러 오는 것이다. 
결국, 노래는 ‘우리와 함께 가자’가 아닌, ‘너희는 좀 더 열심히 살아라’고 말한다. 아무리 좋게 포장해도, 프로그램 자체는 지금의 20대를 ‘타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주체(혹은 우리)’와는 다른 사람들. 우리처럼 노력하지 않는 사람들. 희망적인 말을 하지 않는 사람들. 그렇기 때문에, 희망적인 미래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
우리들은 잉여가 아니다. 세상 모든 것을 통해서 우리들을 잉여라 규정할지라도, 우리들은 잉여가 아니다. 세상 속에 담긴 절망이 너무나 거대하여, 아무 것도 보지 못할지라도, 우리들은 잉여가 아니다. 그 노래 자체에 담긴 이데올로기를 생각하라. 속지 말라. 
생각하기 이전에 달려야 하는 우리들이다. 희망이 없기 때문에 희망의 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절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일단 달려야 한다. 달려서, 뒤처지지 않도록, 밟고, 뛰어 넘고, 그렇게 생존해야 한다. 
말하는 대로,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했는가? 그 말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무슨 말인고 하니, 자기계발서에서 말하는 것과 전혀 차이가 없다는 뜻이다. 어차피 희망은 없다.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달콤한 말에 속지 말라. 그들은 새로운 종류의 마약을 만들어내고 있을 뿐이다. 종교는 아편일 뿐이며, 그에 속는 것은 스스로의 현재(혹은 불행)을 그저 잠시 잊게 만들어 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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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이집트 왕자 시리즈의 세계에서는 신의 존재를 먼저 ‘참’으로 설정한다. 신은 존재하며, 그는 그의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나간다. 이는 헤겔이 말한 “인간의 역사는 신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이다.” 로 압축된다. 
 그 행할 일을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련시킨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던 요셉은, 믿었던 형들의 배신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한다. 거기서도 그나마 잘 할 수 있었던 일은 있었지만 어처구니없는 누명으로 인해 감옥생활을 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이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은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의 길을 이끄소서.” 이는 욥이 했던 고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라이기 어려운 말을 말하였나이다. 욥42:2~3]
 이집트 왕자에서의 신은 ‘모든 길을 내게 맡기라’ 라고 명령하고, 그에 따랐을 때 기적은 일어났다. (여담이지만, 이집트왕자 1 에서는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바다를 갈랐다) 그렇게 신 앞에 선 인간으로서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그의 길을 따랐을 때 회복은 일어났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형들마저 용서할 수 있었다.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 을 준다는 것, 즉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 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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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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