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Do immigrants threaten the national culture and identity? 란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일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동정심이나 통계학적 의미로써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집단 내부의 다양성은 증가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은, 물론 이전의 그 무엇과는 다를 것이다. 쉽게 생각하자, 변화는 변화를 부른다. 큰 변화에서 작은 변화이든, 작은 변화에서 큰 변화이든. 이주자들의 수는 분명 증가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 대한 문화의 변화도(외형적이든 내형적이든)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인식은 어떠한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흑인이나 짙은 황인 계열의) 길을 물어오는데,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런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무엇이겠는가? 물론 자신이 아는 언어(한국어나 혹은 영어라도)라면 친절하게 답을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이 사람들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도망일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두려움에 기인한,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은 두려움이 가장 보편적이다. 물론 그러한 감정을 즐기는 많은 모험심 넘치는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많은 소수중 하나일 뿐이다. 대부분의 적은 다수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무지에 대한 공포는 기본적인 생존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그러한 행동을 백안시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집단적인 공포로 확대하여 하나의 진실이며 순리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문제일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는, 조금만 과거로 올라가서 2차 대전 시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당시 독일의 경우, 1차 대전 패배의 경험과 그로 인한 배상금 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부담감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려한 영광의 시절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으며, 의견 통일은커녕 국가 관념조차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삶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히틀러라는 영웅이 등장하였고, 괴벨스의 언어를 통하여 대중을 휘어잡았다. , 난세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일어날 만한 원동력이 필요하였다. 꼭 실제적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민족이었다. “아리안족은 위대하다.” 라는 명제는 꼭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민족이 실재하는가? 알 필요 없다. 그들을 위대하지 않게만든 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그것은 유대인이었고, 3세계에 대한 착취를 통해 힘을 키운 타 유럽 민족들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인들은 목표 의식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 대중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은 100%의 진리가 아닌, 1%의 진실이니까. 그들에게는 단지 적이 필요했고, 그 훌륭한 대상으로서 선택된 것이 언제나 유럽인의 적이었던유대인이었을 뿐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이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가? 민족이라는 관념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자본가들의 필요성에 의해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근대적 국가가 나타났고,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을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 민족은 단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밈meme일 뿐이며,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민족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가까운 과거에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아직도 IMF 의 상처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수많은 청년 실업자들은 표류하는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조하며,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은커녕 주류에 편입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청년 세대뿐만 아니라, 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안정감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이러한 상황들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책임 추궁에 대해서, 언론과 대기업 등의 엘리트 집단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을 달랠 만한 당근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공격성은, 우리 주변의 많은 소수자를 향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위험하다.

이제 다시 한 번 결론을 지어 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위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변화에 대한 공포는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위협으로 표현하며 무조건 거부하려고만 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광기의 한 형태일 뿐이다.

과학이 계몽시킨 전근대 사회는, 다시 한 번 과학 자체가 이 되었다. 그렇게 근대는 계몽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계몽은 일어나지 않았고, 민중은 편한 마음으로 폭력을 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이루어지는, 통계와 이론으로 정밀하게 계산된, 폭력이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 외국의 문화가 유입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순수성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협으로 느끼는 것. 그러한 생각 자체가 바로 폭력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힘이 국가의 통제력 수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주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문화는 사람이 옮기는 것이므로, 이주에 의한 문화 변화가 매우 클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한 현상은 멀게는 기자 조선이 그러하였고(기자조선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가 그러하였다.

그렇게 문화는 변한다. 변한다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증가는, 분명 좋은 점이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이며 변동이고, 결국 그것은 어떤 면에선 기회로서 주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두려움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미노하
 나는 지난 9월 12일 혜화동을 방문했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로’ 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고, 나도 그 이름을 유흥의 공간으로써 향유하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때는 조금 달랐다. 다른지는 몰랐다, 몰라야 했다. 우리는 그 곳으로 답사를 나갔다. 그 곳에 일종에 ‘필리핀 공동체’ 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를 한번 직접 마주해보라는 것이 이유였다.
 처음 출발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혜화역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처럼 익숙한 분위기만이 나를 반겼다. ‘여기서 대체 무슨 새로운 것을 느끼라는 거지?’ 라고 불평하며 나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길은 물어 가는 것이 정답이긴 했지만……. 동성고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 수업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헤맸음이 틀림없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들은 그 곳에 모였고,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통해 그 곳이 어디라는 것을 듣게 된 후에야, 우리는 이미 환상 세계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았다. 그곳은 쉽게 말해, 한국이 아니었다. 물론 그 곳 역시 한국 내부에 있고, 한국인들이 살고, 생활하고, 발을 딛는 공간space이다. 하지만, 절대로 한국이라는 장소place는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것이 한국인에게든, 필리핀인에게든. 그 곳에서 내가 기대했던 한국적인 삶의 모습은 그리 기대할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은 그 곳에서 이미 마이너중의 마이너가 되어 있었고, 필리핀인들은 메이저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장터에서는 필리핀 사람들이 필리핀 음식과 농산물, 장난감등을 팔고 있었다. 물론 영어도 아닌 필리핀 언어(타갈로그어라고 했다)로. 장터의 경우 내가 갔을 때는 많이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나에게는 충분히 신선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면 혜화성당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주일마다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드린다. 그 미사를 위해서 서울, 경기, 인천 등지에서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우리가 그 곳에 갔을 때, 언어는 필리핀어로 하되, 자막 등은 영어로도 표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서 자세히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길 건너편에는 우리은행이 있었다. 그곳은 다른 영업점과는 다르게, 주일도 영업을 한다. 아무래도 주일마다 오는 필리핀인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던 것 같다. 듣기로는, 그 곳 2층에는 필리핀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았다고 한다. 송금 업무가 그 은행의 가장 주된 업무인 것 같았다. 
 질문지 문항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들과 대화할 때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대화의 폭이 좁아지게 되고, 그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짧은 영어를 동원해서 이리저리 대화를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또 다른 신선함을 느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들도 사람이었다.” 라는 것.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 필리핀인이란, 내겐 단지 숫자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저 필리핀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온, 3D 노동자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그것뿐만이 아님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첫 번째 만났던 사람은, 근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예상대로였다. 5년 정도를 일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고, 동료 문제가 가끔 힘들게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비자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No”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우리의 말실수였음을 깨닫게 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껄끄러운 문제였으리라. 그렇게 첫 번째 인터뷰는 무난하게 끝났다. 
 거기서 용기를 얻은 나는, 두 번째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두 번째 인터뷰는 실패나 마찬가지였다. 라포Rapport 형성 자체를 실패했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를 못했다. 물론 대화를 나누긴 나누었지만, 우리가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혹은 전혀 의미 없는 대답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들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약간은 의기소침한 상태로, 세 번째 인터뷰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했다. 미사가 드려지는 성당의 행정 직원이었다. 그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장소만 빌려 줄 뿐이다. 사실 노점상 하는 것도 별로 달갑지는 않은데, 통행에 방해가 되고 교인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즉 그들이 마음에 들지만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사실, 필자의 교회(개신교)에서도 그런 예배가 있는데, 그것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행정 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딜 가나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든 하나의 생각은 ‘과연 이것을 교회Ecclesia라 할 수 있는가.’ 이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디아스포라’ 라고 할 수 있는 모임을, 똑같이 귀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들이었건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것이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기에, 몇 사람의 인터뷰를 더 해야 했다. 그 다음으로 인터뷰한 것이, 그네에 앉아서 놀고 있던(진짜다) 한 청년이었다. 아무래도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지(혹은 그냥 사람구경하고 있는지) 그네타기에 열중한 표정이었다. 그와 몇 가지 문답을 나누긴 했지만 딱히 특이한 대답은 별로 없었다. 그냥 소득 반 정도를 보낸다든지, 하루 몇 시간을 일하고 얼마나 번다든지, 많이 벌 수 있어서 한국에 왔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다만 고향이 그리운가 하고 물었을 때, 쓰게 웃던 그 모습을 도저히 잊지 못한다. 곤란한 질문을 던질 때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해주던 그분이, 그때만은 얼굴에 그늘을 지우지 못하였나보다.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분이 가장 특이하긴 했다. 신혼여행으로 한국에 왔으며, 온 지 3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할 뿐이었다. 물론,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나중 문제겠지만... 어쩌면, 나의 경험 미숙으로 인해 그들에게 더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원인일 수 있었겠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느꼈던 신기하면서도 안타까웠던 것은, 그들은 최소한 대학 졸업 정도는 하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대학까지 나와서, 여기서 하는 일은 공장일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참 낭비라고 생각됐다. 어쩌면 70~80년대의 한국인들도 이러지 않았을까? 경제 개발기,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왔던 이들의 모습 말이다. 한인촌에 모여 살며, 조금이나마 서로의 ‘공기’를 느끼기 위해 모이려고 했던 그들. 나는 그것과 동일한 모습을 혜화동 로터리, 그 작지만 큰, ‘혜화동 필리핀 공동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각자 한국에 올 때, 가지고 왔던 꿈들은 모두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가수로서 한국에 왔고, 어떤 이는 건축사로서, 교사로서...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행정가’ 로서의 시선. 그들은 단지 부려먹기 좋은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며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원하던 일과 조금이나마 비슷한 일을 할 때쯤, 그들에게는 송환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게 그들은 ‘원칙적으로는 불법인’ 생활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삶은 그들을 외로움으로 몰아넣고 닦달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단체 앞에,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너무나 작은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가톨릭’ 이라는 존재가 조금이나마 그들에게는 결속력으로써 작용했을 것이다. 종교란 참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되는데다가,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데는 더욱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은 그 결속력이 더욱 강하다. 원칙적으로 가톨릭의 종파는 단 한가지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의 ‘집합체’ 로서 ‘권력power’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가톨릭교회는 이민관련 업무라든지, 송금업무, 심지어 의료봉사까지 담당함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가톨릭교회의 응집력은 개신교 신자인 필자로서는 굉장히 부러운 부분이다. 
 조사를 마치고 오기 전에, 그 노점에서 필리핀 음료수 캔을 하나 사 마셨다. 무언가 거북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그 거북함이 좀 강했는지, 다 마시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게 길을 건너 건너편 롯데리아에 왔을 때도 필리핀인들은 많이 있었다. 심지어 우리와 인터뷰했던 그 ‘해맑은’ 청년도 와서 그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거기서 다른 학우들과 조사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그들은 꺼내 놓았다. 사실 그 병아리 요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그 날의 답사는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성고등학교 입구를 지나자마자 느껴지는 그 ‘한국의’ 공기는, 다시 나를 낯설게 했다. 길에 한국인이 더 많다는 것. 노점상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판다는 것. 영어나 타갈로그어보다 한국어가 더 많이, 아니 한국어만이 들린다는 그 작은 사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분명 10m 정도 밖에는 차이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동성고 입구를 점이지대로 하여, 그 곳은 ‘다른 나라’ 나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풍경에 낯설음이 느껴지는 것, 1학기 때 배웠던 ‘인류학 개론’에서 그렇게도 중시하던 내용을, 한 학기동안 배웠던 것을, 나는 그 날 하루 몇 시간 만에 모두 느꼈다. 
 그리고 우린, 너무나 익숙한 것처럼, 지하철 카드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Posted by 미노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물었을 때, 대부분의 동양인이라면 네 앞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학교도서관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인(혹은 서구의 철학에게 묻는다면)이라면 어떠한가? 아마도 지금, 여기에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여기. 혹은 Now-Here.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멀리는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가깝게는 우리네 영화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명령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물론 이 두 개의 구절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곧 비서구 문화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여기에, 기독교와는 다른 방향이지만, 다위니즘이 섞인다면 이는 어긋난 동정심으로 작용하게 된다.

산업혁명기, 자국 내의 발달이 극에 이르러 새로운 소비 시장이 필요해진 서유럽의 국가들은,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세계에 나갔을 때 보았던 것은, 충격의 장면 들이었다. 자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비서구인의 생활양식. 너무나 불결하며’, ‘비참하고’, ‘가난한그네들의 삶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일명 백인의 의무라는 것을 앞세워 좀 더 진화한 우리들이 진화하지 못한 비 백인들을 구제해야 한다.” 하는 인도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은 환경결정론, 문화 진화론, 문명 등의 용어로 대체되어, 비서구 사회를 개척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좋은 환경은 좋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이 생긴다. 그것이 개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열등한문화를 가지고 있을 자들을 위해, ‘우수한환경에서 우수한 문명을 전해주러 가는 것이다. 물론, 대포와 기병을 앞세우고. 뭐 거기서 경제적 부가 창출된다면 그건 당연한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러한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문명에는 우열이 없다. 아니,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문명이라는 말은 없다. 야만인(barbaric)도 없다.

서구인들이 비 서구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하나둘 믿지 못할 발견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이미놀라운 문명이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가 더 열등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라미드가 있었다,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담긴. 거대 고산 도시가 있었다, 자신들도 실행할 수 없었던 복지 사회의 정신으로 세워진. 조금 더 고산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기원전에 세워진 그 도시에는, 엘리베이터와 상·하수도, 3~4층의 아파트가 있는 계획도시였다.

물론 이러한 것은 나중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두 권의 책에서는, 아직 제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근대화라는 환상이, 환상이 아닌 현실로서 살아 숨 쉬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매우 훌륭한 지지(地誌)서이다. 당대 한국의 상황에 대한 현대사적 서술은, 식민지로서의 한국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이 묘사하고 있다(물론 당시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관찰하는 꽤나 객관적인 시선은 한국 사회를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사실은 우리나라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라는 것이다. 한국은 과연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할 정도로가난했다. 국민들은 순박하기만 했고, 부정부패와 수탈로 인하여, 피착취 계급은 근면의 목적조차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소독과 같은 의료적 지식은커녕 기본적인 위생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 관료들은 행정적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척도로 평가받았고, 엽관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자발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습의 폐단은 영원한 어제속에 갇혀서 변동의 가능성조차 차단해 버렸다.

여기까지가 이사벨라(혹은 대부분의 서양 학자들)의 관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조금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개방성이라는 사상은 조선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모내기법의 확대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농민들은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서는 돈을 먼저 지불하고 물품을 주문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광산은 민영으로 운영되었고,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시장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고, 동전 화폐뿐만 아니라 신용 화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거기까지였다. 비변사의 너무나 막강한 권한과 함께, 세도 정치로 인해 생겨난 귀족 계급은 상업 자본의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일본은 이미 서구의 문물을 (외형상으로는)완전히 받아들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사상마저 그들의 스승(영국)에게 잘 받아들인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정하기 힘든 학문적 정론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쉽게 쓰이는 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식민지가 되었던 덕분에근대화가 된 것이 아니다. 다만, 식민지 형태로근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한국의 경제적근대화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한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국가인가? 아니, 정말 근대화란 좋은 것인가?

여기서 일그러진 근대를 보자. 일본은 매우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개방성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다른 문화가 일본에 들어올 경우, 일본은 그것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자기화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섬이라는 특성으로 인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방이라 볼 수 있다.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국가라는 사실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근대화(혹은 서양화)되지 못했다. 한국인에 대한 가혹한 식민 정치나, 경찰 권력의 폭력성 등은 서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서구 국가에서는 이들을 보고 그래봤자 야만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의견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필자가 한번 물어보겠다, 한국은 과연 근대화된 국가인가? 서양은 진정으로 근대화되었는가? 필자는 근대화를 이렇게 규정해보겠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사회의 보편적인 담론을 구성하는 것.” 이렇게 본다면, 아직도 한국에서는, 아니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진정으로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오리엔탈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언어를 사용한 비판이다. 비판을 통해서 상대와 나를 구별 짓는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나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분명 생존의 논리이다. 타자들도 분명히 살려줘!” 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체가 먼저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들도 외치고 있다, “살려줘!” 라고. , 그대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일단 쏘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것이다.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스타에서 미네랄 캘 때 죄책감을 느낄 리는 없다.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끼는가? 만약 그대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주체이다.

다만 그 생존의 논리가 정치적 논리로 확대되어 오용될 경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일본에 대한 야만적이라는 비판은 일본마저도 아시아의 국가임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담론을 낳았다. 이러한 것은 당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싶다. 이 무슨 마초스러운 발언인가. 그렇다면 서양은 남성이고 동양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뜻인가? 저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저 문장이 바로 남성주의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의 결정체이다. 서양인에게 있어, 동양은 신비로움과 부드러움, 보물들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인은 동양인들을 계몽하고 다스리며 복속시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성, 그렇게 다시 계몽의 목표물이 되었다. 이제 다시 계몽을 계몽시켜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Posted by 미노하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 많은 일들 모두와 함께, 이제 막이 오른다. 

지금은 어두운 시대이다. 삶에 희망은커녕, 절망조차 보이지 않는 이 어둠 속에서,
과연 주님의 이름으로 서 있는 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주님의 사람들이, 주의 이름을 들고, 사랑은 선포하지 못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런데 사랑이 없는 이 곳에, 
주님은 어디 계신가?

그 사랑을 선포하자. 
다시 한 번 회복의 역사가 일어나리라. 
이 어두운 시대에, 우리는 노래하리라. 
기쁨의, 감사의, 찬양의 노래를 외치러 나아가자. 

이 땅에, 희망이 있기를.

'For His Glory > 기동전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마서 큐티  (0) 2011.08.06
다시 백년이 흘러  (0) 2011.07.02
페마 찬양  (0) 2011.07.02
Posted by 미노하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걸었다
길은 어두웠고
등대는 점점 희미하게만 비추어갔다
함께 걷고 있었고
잡은 손 아직 놓지 않았다
어둠을 보았다
희망은커녕 절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했던가
다행히도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제 절망은 볼 수 있다
어디로 갈 지 알련다
도망치고 다시 달려들어
이제 다시
그저 걷는다

'글쓰기 > Be문학 非문학'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랜만에 온 카페, 그 길  (0) 2012.07.13
도서관, 책, 길, 겨울  (0) 2011.10.31
아늑하다  (0) 2011.07.06
오랜만이다  (0) 2011.07.06
건강  (0) 2011.07.06
Posted by 미노하
서문

 고등학교, 그것은 누구에게나 가장 큰 기억으로 남아 있을 만한 문화적 기억이다. 그 곳에 있었을 때, 우리들은 모두 가장 화려했던 시절을 보냈다. 청소년기의 마지막 시절, 회광반조와도 같은 반짝임으로 고등학교의 3년을 보냈다. 1318이라는 말을 들어보았는가? 사회학자들은 보통 이 시기를 십대teenage 라 말한다. 중고등학교의 6년간이 정말 ‘십대다운 십대’ 라 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지금, 그 십대의 시절을 다시 뒤돌아보며, 지금 그 시기를 걷는 이들과, 그 시기를 함께 걸으며 그들을 바라보아야 하는 어른들과, 그 시기를 추억하는 이들과 함께, 그 시절을 다시 한 번 걸어 보기로 했다. 그런 생각에서 만들어 낸 인터뷰 대상자의 목록은 다음과 같다. 
1. 동기동창이자 오타쿠 집단 내에 있던 친구 A. 
2. 오타쿠 집단과 관계없던 친구 B. 
3. 현재 고등학교 재학 중인 후배 C. 
4. 현재 고등학교 교사인 D. 
 일단 필자에 대한 소개를 먼저 하려고 한다. 필자는 배재중 배재고를 나왔다. 즉, 얼마 남지 않은,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불쌍하게 여기는, 남중-남고 라인이다. 여담이지만, 국사교과서에도 나오는 우리 학교 건물은,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매점’ 건물이다. 어쨌든, 나와 함께 그 남중-남고를 보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주가 될 것이다.
 십대의 시기는 또래 집단을 만드는 시기이다. 절대로 자연스러운 또래 집단만으로는 정말 제대로 논 사람이 아니다. 필자는 그것을 후회하며, 그렇게 ‘놀았던’ 사람들에 대한 인터뷰로써 특정 담론에 대한 지식을 얻기로 했다. 
 특히 필자가 관심을 가지는 집단은, 어느 반에나 있다는 ‘오타쿠 집단’에 관한 이야기이다. 반에 몇 명씩 있고, 저들끼리 몰려다니며, 알 수 없는 말로 떠들며, 전혀 삶과는 관계없는 것에 열광하는 그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이다. 필자가 이것을 주제로 삼을 수 있었던 것은, 별로 자랑할 것은 못되지만, 필자도 이 집단에 발을 어느 정도는 걸치고 있었고, 이들이 현재까지 남아 있는 가장 오래된 고등학교 친구들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고 싶은 주된 이야기는 ‘과연, 또래 집단으로서의, 오타쿠란 무엇인가’ 이다. 어떤 특정한 가설에 대한 증명이 아니라 단순히 오타쿠 문화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그들만의 특정한 사고방식과 문화 구조, 용어 등에 대해서 조사하기로 하였다. 

1. 오타쿠 안에서 보는 오타쿠-너네, 대체 정체가 뭐냐?

 그림을 첨부한다. 이 그림을 보고 생각나는 것은 무엇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텔레비전 색 테스트인가?” 또는 “바코드 같은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애니메이션 마니아 혹은 오타쿠라면 할 수 있는 외침은 “하루히!” 일 것이다. 혹은 “스즈미야!” 라고 할 수도 있다. 뭐, 똑같은 캐릭터이긴 하지만. ‘스즈미야 하루히의 우울’ 이라는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을 그린 색들을 적당히 조합하여 만든 그림이다. 참고로, 그림 밑에는 “이 사진을 이해하는 것은 당신이 오타쿠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라고 적혀 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필자는 이것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친구들은 이 그림을 알아보며 스스로 좌절했다(“내가 오타쿠라니!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오타쿠라니!”). 
 가장 먼저, 오타쿠란 무엇인가? 오타쿠란 용어가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sf 동호회가 등장하던 시기의, 초기의 동호회 문화였다. 오타쿠란 お宅 를 한글로 읽은 발음이다. ‘오 お’는 경어 자격의 접미사이며 ‘타쿠 宅’란 ‘댁’이란 뜻이다. 보통 우리도 쓰는 말로서, “댁은 어떠신가요?” 할 때의 그 ‘댁’ 이라는 말이다. ‘당신’이라는 말은 ‘아나타あなた’ 이지만, 그것을 극존칭으로 사용하는 것이 오타쿠お宅 라는 말이다. 마니아들끼리 만났을 때 서로를 지칭하는 말로써 오타쿠라는 말을 사용하였던 것이 고유명사로 굳어진 것이다.
 최근에는, 그러한 오타쿠들의 세대를 나누어 1~3세대로 구분하기도 한다.
 1세대 오타쿠란, 오타쿠란 말이 생기기도 전부터 마니아였던 자들로서, 현재는 2, 3세대를 주된 소비자로 하여 ‘먹고 사는 오타쿠’를 칭할 수 있다. 현재의 반다이, 가이낙스 등의 애니메이션 제작사의 사람들이 이에 속한다. 참고로, 미야자키 하야오도 오타쿠라 볼 수 있다. 1세대 오타쿠들의 명언이 여기서는 통할 수 있었다. “마니아가 세상으로 만화를 보는 사람이라면 오타쿠는 만화로 세상을 보는 이들이다.” 라는 명언이 통하는 유일한 세대이다.
 2세대는 후발 오타쿠라 할 수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애니메이션 등의 산업에서 일을 하며 먹고 살기는 하지만, 거장은 되지 못한 이들을 칭하여 2세대 오타쿠라 한다. 여기까지는 무난한 수준이다.
 하지만 현재 사회에서 문제가 되며, 한국에서도 많이 나타나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3세대 오타쿠이다. 이들까지 오면 더 이상 お宅라는 경어체를 사용하지 않으며, オタク라고 가타카나로 적는다. 즉, 고유명사화 된 것이다. 한국인들이 잘 알고 있으며, 신기하게 생각하고, 때로는 경멸하기까지 하는 오타쿠들은 주로 이들을 지칭한다. 현재 일본에서도 이것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그렇다면, 오타쿠들 스스로는 오타쿠들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가? 대부분의 경우는, 자신들을 오타쿠라 부르는 것을 싫어한다. 특히 그 오타쿠라는 어감에 담긴 필연적인 ‘경멸적’ 뉘앙스 덕분인지 그냥 오타쿠처럼 생겼으면 ‘야 이 오타쿠야’ 하는 식으로 다른 사람에게 욕을 하는 데 사용되기도 한다. 옆의 그림이 ‘오타쿠’ 하면 떠오르는 부정적 의미지의 대표라 할 수 있다.

2. 오타쿠 밖에서 보는 오타쿠-왜 그들을 싫어하는가?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오타쿠에 대한 이미지는 어떠한가? 먼저, ‘민간인’ 이라 할 만한 이들에게 물었을 때 가장 많이 나왔던 단어는 ‘애니’였다. (기타 화성인 바이러스, 더럽다(!!), 안경, 변태 등이 나왔지만 그것은 일단 접어 두자) 
 왜 하필이면 ‘애니’인가? 왜 만화 영화가 아닌가? 필자도 그러하듯이, 많은 사람들이 어린 시절 만화 영화를 보면서 자라왔다. 그리고 그것은, 꽤나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 있다. 카드캡터 체리를 기억하는 많은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지금도 그것을 보면서 좋아하는 오타쿠들은 많이 있다. 다만 그것을 카드캡터 사쿠라 라고 부르는 것이 다를 뿐. 그래서 지금의 오타쿠들이 향유하는 영상물들은 똑같은 만화 영화가 아니라고 ‘구별 짓는’ 것이다. 또한 그렇게 구별 지어야 한다. 위에서 말했듯이, 오타쿠들에 대해서는 좋은 이미지가 형성되지 않는 것이 우리 한국 사회이다. 그들은 소수자임과 동시에 사회적 영향력(권력이라 칭할만한)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이 향유하는 문화와 자신들이 향유했던, 아름다운 추억이여야 할, 문화가 동등하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상황이다. 일종의 ‘구별짓기를 통한 정체성 형성’과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과현 오타쿠들에 대한 낙인찍기가 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가? 슬프게도, 사실이 그렇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소수자의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 게다가, 몇몇의 특이한 사람들이 매체를 통하여 알려진 덕분에(화성인 바이러스 등의 TV 프로그램) 오타쿠들에 대한 인식은 더할 나위 없이 나빠지게 되었다. 게다가 그들의 대부분이 외양 자체가 나쁘기 마련이다. 취미에 너무나 열중한 나머지 생활마저 해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보통 [안경+여드름+돼지] 인 경우 '안여돼' 라 하여 오타쿠와 동일시한다). 물론 오타쿠들 중에도 유명한(혹은 사회적 위치가 충분히 있는) 사람들은 많다. 예를 들어, 아소 타로 총리, 무카이야 미노루, 연예인 이시영 등이 있다. 하지만, 그들은 지극히 소수이다.
 현재 일명 ‘오타쿠 산업’을 이끄는 대부분의 소비자들은 아르바이트나 부모님의 용돈 등에 의존하여 사는 사람들이다. 즉, 칭찬하려야 할 수 없는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게다가 지독히 자기중심적인 성격에 혼자서 딴나라에 사는 듯한 대화 등은 도저히 그들에게 친밀감을 느낄 수 없게 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오타쿠에 대하여 혐오감을 가지게 되는 계기는, 그들의 피규어 수집 버릇에 대해 알게 된 이후이다. 피규어란, 애니메이션이나 영화 등의 주인공들을 장난감으로 만들어서 파는 것인데, 주된 소비자층이 아이들이 아닌 오타쿠이다. 그런데 이것이 정상적인 것을 만들어 판다고 해도 거부감이 드는 것이 정상인데, 많은 문화가 그러하듯이 이것도 많은 제품들이 속칭 ‘변태적인’ 쪽으로 흘러가게 된다. 관련사진은 대부분 수위가 너무 높으므로 생략한다.
 게다가 게임 쪽도 많은 작품이 성인물 쪽으로 흐르는 경우가 많다.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줄여서, 미연시)가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미연시란, 말 그대로 연애의 과정시뮬레이션 게임으로 플레이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컴퓨터를 했던 남성이라면, 대부분 ‘투하트’ 나 ‘동급생’등을 알고 있을 것이다. 오타쿠들도 이러한 작품들은 ‘명작’ 반열에 올려두고 한번씩은 플레이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분야도, 상업주의적 성 문화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아니, 사실 이 분야가 주된 성인 문화의 무대라고도 할 수 있겠다, 오타쿠들의 이야기지만. 최근의 미연시 중에서는 19금 딱지를 떼고 나오는 작품을 거의 찾기 힘든 상황이다.
 다른 것은 다 이해하겠지만, 피규어 수집이나 미연시 게임을 하면서 즐거워하는 오타쿠들의 심정은 필자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주관성’ 을 버리지 못하겠으므로 생략한다. 

3. 일반인 코스프레? 너도 오타쿠!

 그래서 심지어 최근에는, 아무리 봐도 오타쿠로 보이는 이들마저 자신들은 오타쿠가 아니라고 주장한다. 게다가 오타쿠라는 말 마저 그 강한 어감을 약간씩 순화시켜 사용한다. [오타쿠->오덕후->덕후] 의 순서가 그 대략적인 예가 될 수 있겠다. 요즘에는 어느 정도 인터넷을 한다는 사람끼리는 오타쿠인지 아닌지 구별이 힘들어 지기도 했다. 게다가 그들 중에도 충분히 지식인층이 등장해서 스스로를 잘 ‘감추고’있는 편이다. 이것에 관해서는 ‘일반인 코스프레’라 하여 따로 설명하겠다. 여담이지만, 최근에는 ‘덕후’에 대한 비하적인 말로서 ‘십덕후’ 라는 말을 사용하기도 한다. 
 오타쿠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용어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일반인 코스프레’ 이다. 코스프레란, 오타쿠들이 자신이 좋아하는 캐릭터로 분장하는 것을 말한다. Costume Play 를 일본어로 줄여서 コスプレ(코스프레)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일반인’ 코스프레란? 이는 실제로는 오타쿠인 사람들이 일반인인 척 하며 일상생활을 하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아이돌 가수 팬들이 일상 생활에서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으로 사는 것이 이에 속한다. 그리고 이것을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을(동성애자들의 커밍아웃과 같은) 줄여서 ‘일코해제’ 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들은 오타쿠라고 불리며 경멸당하지 않는다. 이들은 일명 ‘용자’ 라 불리며 칭송받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이들은 이미 사회적 기반을 갖추었기 때문이다. 공개적으로 오타쿠 인증(증명)을 할 수 있는 것은, 그렇게 할 만한 용기뿐만 아니라, 그렇게 해도 “취향이니 존중해 주자”라고 할 만한 위치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렇듯, 취향을 주장할 수 있는 것은, 사회적으로 허용하는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그런데, 언제나 나오는 오타쿠들의 명언으로서, “취향입니다 존중해 주시죠.” 가 있다. 이것의 출처는 디시인사이드 무협, 판타지 갤러리(당시에는 하나였다)와 타입문넷과의 싸움에서 한 일본 판타지 소설 오타쿠가 사용했던 말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그들도 서로를 인정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물론, 그 싸움들이 어떠한 형태로 진행되었는지는, ‘그들’이 아닌 이상 이해하기 힘든 범주이다. 
 “너희들도 무언가를 좋아하는 만큼 우리도 우리의 취향이 있을 뿐.” 이라고 오타쿠들은 말한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축구를 예로 들어 보자. 보통의 남학생들이라면 유럽 축구에 매우 관심이 많다. 바르셀로나, 맨유, 레알 마드리드, etc. 뭐 이런 것 있지 않는가? 그런데 그들은 그 팀별 선수들 목록을 다 외운다. 정말 다 외운다. 심지어는 나이와 경기 스타일, 출신 국가까지도 기억하는 경우가 많다. 그들은 오타쿠들이 애니메이션 같은 것을 좋아하는 만큼 축구를 좋아하는 것이다. 

4. 오타쿠들이 모이는 곳-온라인, 오프라인

 우리가 주로 모였던 때는 역시나 고등학생답게 쉬는 시간이었다. 쉬는 시간에 어느 한 반에 모인다. 장소는 일반적으로 무리 중에 속한 사람이 가장 많았던 반으로 암묵적으로 정해진다. 그 사람들이 앞자리에 앉아 있으면 더욱 좋다. 또 다른 모임의 시간은 점심시간이었다. 점심시간에는 주로 도서실에 모여 잡담을 나눈다. 그 곳이 모임의 공간이 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역시나 ‘컴퓨터’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타쿠의 활동은, 대부분의 경우 컴퓨터를 통하여 이루어진다. 물론 고등학교 시절이기에 누군가 노트북을 가져온다든지 하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오타쿠들이라 할 만한 사람들이 모이는 온라인 공간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디시인사이드 : 그저 성지(聖地)이다. 거의 모든 분야의 오타쿠들이 모인다. 그 분야는 철학에서 정치, 디카, 컴퓨터, 애니, 게임, 물리학, 연예인까지 생각할 수 있는 대부분의 분야는 다 있다고 봐도 된다. 최근에 사용하는 대부분의 인터넷 은어들은 여기서 탄생된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2채널 : 일본의 익명게시판이지만 현재 한국어 번역이 연계되기 때문에 한국인들도 많이 보인다. 일본의 디시(디시인사이드)와 같은 존재. 여담이지만, 2ch(2채널) 과 디시는 앙숙관계.
웃긴대학 : 유머 사이트. 보통 고등학생 이상은 잘 보이지 않는다. 필자와 인터뷰했던 이들도 이곳은 잘 알지 못했으므로 생략.
엔젤하이로 : 사이트 운영자인 “함장” 이 만든 개인홈페이지. 엔하위키라는 백과사전을 운영중이다. 위키백과와 속성은 동일하지만 주로 서브컬쳐(오타쿠 문화, 정치관련 뒷담 등)를 다룬다.
 이외에도 온라인 공간으로 이글루, 타입문넷, 루리웹 등이 있으나 그곳은 필자같은 사람이 접하기엔 너무 위험한(!!) 곳이므로 조사하지 않았다. 루리웹에 대해서는 간단하게 ‘비디오 게임 정보’ 라고 설명할 수 있다고는 들었다.
 또한, 오프라인 공간으로도 몇 가지가 있다. 대표적인 것만 소개한다. 
지스타(G-Star, G★) : 컴퓨터 게임 전시회. 게임 오타쿠들이 많이 출몰한다. 
코믹월드 : 대한민국 오타쿠들의 총집결지. 서울과 부산에서 이루어지며, ‘코믹’ 이라 줄여 부른다. 동인지 판매와 코스프레 등이 이루어진다. 일본어노래 부르기 같은 이벤트도 많이 있는듯.
KOBA : 방송, 영상, 음향, 조명기기 등을 전시하는 박람회. ‘방송부’ 같은 동아리의 학생들이 가면 그저 행복한 곳. ‘행사’ 와 관련된 기계류는 거의 다 있다고 보면 된다.
사진영상 기자재전 : 사진 및 영상과 관련된 장비를 전시한다. 브랜드별 최신 제품을 직접 만져볼 수 있다. KOBA 와 성격이 비슷한듯하면서도 약간 다르다. 

5. 결론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이와 같이, 알 수 없는 타자에 대해 무의식적으로 배제하려 하며, 그것을 증오하기까지 하는 것은 우리 인간에게 남아 있는 일종의 ‘생존본능’ 이다. 즉 우리가 오타쿠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그들을 싫어하고, 배척하고, 공격하기까지 하는 것이다. 오타쿠들도 사람들이 자신들을 싫어하는 것을 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인인 척(일반인 코스프레)을 하며 살아간다.
 미디어에서 등장하는 오타쿠는 그 중 지극히 소수에 불과하다.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 들이 현실의 ‘매니아층(혹은 오타쿠)’과 겹친다고 해서, 실제 오타쿠들의 다수가 그렇게 사는 것은 아니다(이건 진짜다). 현실의 오타쿠들은, 대부분 일반인들과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수만이 좋아하는 문화를 향유할 뿐이다. 그들을 공격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들도 각자의 취향이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취향이 매우 마이너한 취향이고, 외부인이 접근하기에는 무언가 거부감이 들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은 사고 구조 자체가 많이 다른 측면이 있다. 그러므로 싫어하려면 먼저 그들에 대해 안 이후에 하자. 무턱대고 싫어하는 건 ‘이디오진크라지’ 일 뿐이다. 
 요즘 생겨나는 많은 오타쿠 관련으로서는 밀덕후(밀리터리 오타쿠), 소덕후(소녀시대 오타쿠), 겜덕후(게임 오타쿠, 겜타쿠라고도 함) 등, 많은 분야들이 있다. 심지어 학문 덕후나 종교 덕후라는 말도 등장한다. 위(1장)에서 말했듯이 “오타쿠란, お宅(おたく). '당신', '댁'이라는 뜻을 지닌 이인칭 대명사로 쓰이는 일본어이다. 그렇다. 당신이다!”

후기

 필자는 이 주제를 “오타쿠 문화 하면 그래봤자 서브컬쳐 문화에 불과하겠거니...” 해서 그냥 쉬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하지만 역시나, 문화라는 것은 절대로 그 현상 자체만을 연구할 수만은 없는 것 같다. 그 맥락과 사고방식 속에서의 이해까지가 성립되지 않으면, 그저 또 하나의 편견에 불과한 것이다. 
 연구를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인터뷰 대상자들의 반응이었다. 모든 사람들이 오타쿠라는 집단에 대해서 거부감을 나타내었다. 심지어 오타쿠라고 생각해서 접근하여 오타쿠들에 대한 질문을 했을 때조차, 그것을 모욕이라고 생각하였다. 이에 대한 이해는 위에 모두 적어 두었다.
Posted by 미노하

블로그 이미지
잉여에게   희망을
미노하

공지사항

Yesterday
Today
Total

달력

 « |  » 2024.4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최근에 올라온 글

최근에 달린 댓글

글 보관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