밖으로 나서고 싶지 않았다. 그 곳엔 또 무엇이 있었을까. 안으로 침잠하던 나의 그리움들은, 이제 무엇을 보고 있을까. 사실 무엇조차도 보고 싶지 않았다. 그 길에 더 이상 네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확신하기에, 보고 싶지 않지만 그렇게 존재하는 현실이기에, 그저 눈을 감을 수 밖에 없었다. 

어디엔가는 거하여야만 했다, 나의 참을 수 없던 나태함들은 그렇게 흐드러져 나를 보게 했다. 내 안에는, 안타깝게도 너만이 남아 있었다. 가벼운 노랫말조차 내 안에 채워져 나가, 결국 비울 수 없을 정도로 무거워졌다. 그래, 이제 하늘을 보아야 하거늘, 아직도 땅에 거하는구나. 머리가 곧기는커녕,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그렇게 숙이고만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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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도서관에서 과제를 하던 중에 희끄무레한 무엇이 보였다. 눈인 줄 알고 "아, 이제 겨울인가?" 하다가 깜짝 놀라서 다시 보니 다행히도 길에 있는 흰 차들이었다. 갑자기 느꼈다, 이제 곧 진짜 겨울이다. 

항상 이맘때쯤 느끼는 것이 있다, 이룬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두려움. 도서관에 앉아 무언가 하고 있지만, 옆에 있는 빈자리들을 보며 외로움과 우월감을 느끼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락함은 없다. 난 지금 무엇을 보고 있는가?

다시 한 번 창밖을 바라본다. 이렇게 이 자리에 앉아있으면, 이제 곧 진짜 겨울도 다가오겠지. 창 밖에 첫눈이, 둘째 눈이, 그리고 이제 함박눈도 보게 될 거야. 그리고 난 그 길들을 걸어가며, 다시 하늘을 보겠지. 

책 속에는 하늘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래도 나는 아직 하늘을, 파란, 바람이 부는, 그 아름다움을 상상해. 그 곳에 네가 있을까? 너도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책 속에는 없지만 그래도 나의 손에는, 손끝에서 피어나는 짤막한 잉크 속에는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 겨울날, 너와 내가 함께 걸었던 길, 이제는 추억으로도 남길 자격이 되지 못하는 그 안타까움. 이제는 함께 있겠지. 그래,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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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너희들이 말하는 '시위꾼'의 뜻이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무리'라면, 나는 기꺼이 시위꾼이 되겠다.
너희들이 말하는 '좌파'의 뜻이 '상처를 드러내어 치료하고 치료하려 노력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감사히 좌파가 되겠다.
너희들이 말하는 '빨갱이'의 뜻이 '희망을 선포하는 사람들'이라면, 나는 당연히 빨갱이라 불러주어 마땅하다.
너희들이 말하는 '입진보'의 뜻이 '이론의 담론화 자체에 힘쓰는 학문업자'라면, 내게 입진보라 칭하는 것은 칭찬이다.

20세기 초반 구조주의와 마르크시즘의 혈통을 받아 태어나, 유럽 사회학계를 휩쓸어버린 사회이론, 프랑크푸르트 학파의 '비판이론'이라는 것이 있다. 담론 구조와 그의 해체, 구조주의적 사고구조에 대한 해석적 관점 도입과, 그를 통한 마르크시즘의 체계화. 문화 자체의 상업화를 바라볼 수 있는 관점. 상부와 하부구조의 재해석. 이 미친 양의 작업을 모두 해냈던 비판이론을 단 한 줄로 요약하면 이러하다.

"네가 무슨 권리로 구분해? 구분이 가능하긴 하냐? 아는 척 쩌네."

결국, 진보든 보수이든, 스스로의 닫힌 체계 속에 갇혀, 수많은 보조가설들만을 생산해내고 있다. 여기까지가 비판이론을 5년동안 공부한(맛뵈기만 했던 고등학교 시절 포함) 서요한이라는 사회학도(나는 아직 업자가 아니니까)의 관점이다. 
너와 나는 있지만, 아군과 적군은 없다. 모든 것은 하나이며 동시에 전체이다. 각자의 논리성에는 결국 공유하기로 합의한 합리성만이 존재한다. 지식은 존재하지만 진리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시 한 번만 더 말하겠다.

"네가 무슨 권리로 구분해? 구분이 가능하긴 하냐? 아는 척 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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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신교는 구교와의 논쟁 과정에서 성상파괴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는 sola gratia와의 연결선상에서 바라볼 수 있는데, 인간의 어떤 방법으로도 신에 대한 이해가 불가능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상은 그저 '우상'이 될 뿐이다. 인간이 만들어 낸 것이지만, 인간으로부터 외재화되어, 결국 fetishism으로 이어진다. 결국 신 자체에 대한 숭배는, 성상으로 인해 방해받는 것이다.

신교는 합리화의 물결에서 최우선에 있던 자들이다. 지식의 보편화, 과학에 대한 믿음, 청각 이미지. 그를 통하여 쉽게 '전해질 수 있는 것' 에 대한 믿음과도 비슷하다. 복음은 전해져야 존재하는 것. 스스로 알 수 없는 '신'. 다른 사람으로부터 '들어야'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 

가톨릭에서는 고행에 꽤 큰 가치를 부여한다. 어찌 보면 지금의 포괄주의와도 같은 논리일 수 있다. 고행을 통해서 죄가 속죄되고, 선행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다. 각자가 각자의 신을 섬기지만, 결국 그 모두가 하나님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미지, 즉 성상을 통해서 보여주는 것 만으로도 신을, 하나님을 섬길 수 있다. 이미지 자체가, 자연 자체가 하나님의 모습을 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인간과 자연의 구분, 혹은 경계선을 낮추려는 시도이기도 하다. 

과학은 주체와 타자를 맹렬할 정도로 구분한다. 거칠게 구분된 이 세계는, 도구화된 이성을 통해서 통제된다. 주체에 대한 보호, 타자에 대한 조작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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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누가복음 19:4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나에게 장비는 악기와도 같다. 카메라, 노트북, 연필, 심지어 핸드폰조차. 기타는 당연히 악기 아니더냐. 누군가는 그 악기들로 음악을 연주하며 즐기기도 하고, 누군가는 아름다운 찬양으로 기뻐하기도 하며, 누군가는 극도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며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린다. 무엇이 맞고 무엇이 틀린 것은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뜻대로 사용하여, 어떤 목표를 이루는 것뿐이다.

나는 장비들을 통해서, 주님의 피조물들을 담는다. 이미 주님의 영광은, 피조물 속에 모두 서려져 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주님의 그 영광들을 반사하여 주님께 돌려드리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영광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은혜의 전달자가 되어야 한다.

악기를 가진 사람은, 자신의 음률에 섞여 있는 주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님의 영광을 더 잘 드러내고, 결국 주님께 기쁨이 되는 찬양을 드려야 한다. 사진도, 나 같은 글쟁이도, 다른 그 어떤 것도 동일하다.

내가 가진 장비들을 가리켜 '쓰레기'라고 칭하는 것은 좋다. 물론 그것은 나도 인정하는 바이다. 그렇다 해서, 나의 실력도 쓰레기인가? , '쓰레기'같은 장비조차 소화하지 못하는 나의 실력은, 그 말에 도저히 반박하지 못하게 한다. 물론 지금보다 더 좋은 장비를 쓰고 싶은 마음은 가득하지만, 지금의 장비조차도 나에겐 버겁다. 물론 금전적 문제가 가장 큰 것은 사실이지만.

언제나 말하지만, 내가 가진 것은 가난밖에 없다. 그것이 자랑이다. 나는 돈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돈으로 채워야 하는 부분들을 지금까지는 노력으로 메워왔다. 책을 사서 볼 수 없기 때문에 도서관을 애용했고, 그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없기 때문에 그 책을 한 번 더 읽는 길을 택했다. 대화할 이가 없었기 때문에 책이 나의 친구가 되었다. 생각할 시간도 없었기 때문에 책이 나를 위해 대신 생각해 주었다. 그러한 지식조차 결국은 찬양의 도구이다.

나의 실력이, 그 어떤 것에 관한 실력이든지, 부족한 것은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찬양에는 은혜를 담으려 노력한다. 아까부터 계속 말했지만, 찬양이라는 말에는, 사진, , 영상, 음향, 노래, 연주 등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비록 은혜를 담기엔 많이 부족한 점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은혜가 담기는 순간은 많다. 이는 나의 노력으로 인한 것이 아니라, 주께서 나를 쓰고자 작정하고 나와 함께하시기 때문이다. 나는 원래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맨 처음 뮤지컬 대본 작업을 시작했던 것도, 그저 시켜서 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제, 나의 만년필은 찬양의 한 도구가 되어 있다.

나는 주님의 피조물을, 악기를 통해 담는다. 그 악기가 뭐가 됐든 좋다. 악기는 찬양의 가장 기본적인 도구이다. 가장 기초적인 수준으로 내려온다면, 몸을 악기로 사용하는 것이 될 것이다. 나는 그래서 춤을 통해 찬양할 수 있는 사람이 참 많이 부럽다. 나는 뭐 하고 있는가. 멀쩡한 몸을 두고, 춤을 통해서도 찬양할 수 있거늘, 나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 춤을 추지 않는 것은, 멀쩡한 장비를 쓸 줄 모른다고 내버려두는 안타까움과 같다. 게다가 몸이란, 입으로 하는 찬양과 더불어 최고의 장비 아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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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뭐라 해야 할까? 시각장애인을 묘사한 영화다보니, 그에 대하 연출 측면의 완성도는 미친듯이 높다. 물론 영화란 놈 자체가 매우 높은 수준의 시각적 집중도를 보이긴 한다. 그런 매체적 특징으로, 시각이 없는 사람의 입장을 서술한다는 것은, 상상력 이상의 무엇을 필요로 할 것이다. 문맹자가 주인공인 소설 이상의 상상력이 필요한 곳이 바로 이런 류의 영화이다.
이것을 연출자(혹은 감독)은, 음향에 대한 미칠듯한 집착으로 이루어낸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는, 음향은 보조적인 수단일 뿐이다. 5.1채널 혹은 그 이상의 기법이 등장하고 또 활용되지만, 시각 속에 짓눌려서 그저 장판 역할 이상은 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는, 음향효과가 묘사의 주역으로 활용된다. 
1인칭 시점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사용된 녹음법은, 음향을 통해서 관객이 함께 음원의 방향을 ‘추적’할 수 있도록 허락한다. 지하철, 발자국 소리, 옷과 관절의 바스락거리는 소리, 목소리 하나하나까지. 그리고 그런 소리들의 절정은, 마지막 비가 오는 장면에서 극대화된다.
빗소리는 모든 방향에서 다르게 들린다. 이것은 일종의 화이트노이즈와도 같다. 다른 영화들에서 빗소리가 녹음되는 경우, 그냥 ‘빗소리’로만 들린다. 단지 소리로 그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소리 이상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여러 개의 스피커가 각기 다른 방향으로 행한 녹음을 통하여, 그 공간에서 날 법한 빗소리를 들려주는 것이다. 

요약 : 음향덕후에게 이 영화 강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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