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속담이 있다, “피할 수 없다면, 즐겨라.” 사실 이는 대표적인 오역 중의 하나이다. 원어대로 번역하자면, “피할 수 있다면 전력으로 피하고, 정 불가능하다면, 흘려보내라.”


피할 수 없다고 즐기면, 그저 우리네 삶이 갈려나갈 뿐이다. 


지금 여기에서 사람이 갈려나가고 있다. 그 갈려나간 자리에 술을 부어 아프지 않게 할 수는 있겠지만, 과연 그것이 해답일까. 우리의 이 고통들에 대하여, 누가 설명이 필요하다. 대체 왜 우리는 이따위로 고통스러운, 부조리한, 설명할 수 없는, 지금 여기에 지옥이 있는 삶을 쓸데없이 이어나가야만 하는가? 우리는 어디서 '평안'을 찾아야 하는가?


많은 사람들이 힐링을 찾고, 쿨한 것을 갈구하며, 새로운 것을 찾는다. 모든 논리는 단순하다, 단지 지금 여기만 아니라면, 지금 여기의 이 지옥만 아니라면, 그 어디라도 행복하리라는 믿음이다. 강신주를 좋아하는 것도, 종교적 인기를 얻는 것까지도, 결국 그 맥락이다. 지금 여기의 지옥, 모든 이들이 방황하며, 모든 단단한 것들이 표류하는 사회. 그 곳에서, “괜찮아”라는 말과 함께 "너는 올바른 것을 택하였다"라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다. 


정답만을 요구하는 사회, 하지만 그 누구도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바쁜 시대. 우리가 택한 것이 정답인지, 그에 대한 확신을 추구하지만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어떤 이들은 교회로 올 것이고, 어떤 이들은 강신주를 찾는다. 강신주는, 인문학은, 멘토들은, 베스트셀러 책장에 가득한 자기계발서들의 정답'들'의 담론투쟁은, 분명 평안을 제시하고 있다. 


강신주, 인문학, 인디, 홍대, 그 모든 '대안'들은, 삶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하는 '충만함'을 전제한다. 그 충만함의 크기만큼, 우리는 각자 삶 속의 고통들이 빠져나간 공허함이 있을 것이다. 그 자리를 채워주고 우리를 온전하게 하는 이를, 우리는 구세주로 모셨다. 어떤 이에게는 예수, 어떤 이에게는 강신주가 그러할 것이다. 하지만 교회보다는 강신주가 훨씬 세련되고, 보편적이고, 어디 가서 부끄럽지 않다. 강신주라는 이름은, 소비자들에게도 권력이 된다. 


교회가 강신주와 동일한 정답만을 주려 한다면, 교회는 강신주에게 자리를 빼앗길 것이다. 교회는 “너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와 “이 죄인아!”의 사이에서 헤매고 있을 뿐이다. 개인을 끝없이 낮추고, 절대자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은, 어느 정도는 인간의 본성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일상의 용어로 번역돼서 보편적 ‘상품’이 될 수 있는지는 의문이다. 


예수는,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주었다. 우리의 죄를 사하는 조건은 이웃의 죄를 용서하는 것, 빚을 사함받는 조건은 이웃의 빚을 사해주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웃의 빚을 아무 이유없이 사해주어야 한다. 누가 보아도 오답인 선택이다. 


모든 사람이 동등하고, 평등하며, 모든 이들의 선택이 그 자체로 옳다 인정된다. 거기에 정의가 있고, 하느님 나라의 공의가 있다. 하느님 나라는 거기에 있다. 천국은 분명 틀린 답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틀린 답이 아닌, 똑같은 정답을 제시하려 한다. 


예수는 분명 우리를 친구로 불렀는데, 우리는 그를 구세주의 자리로 올리고, 스스로는 한낱 노예의 자리로 내려가려 한다. 하지만 예수는 우리의 자리로 내려 올 것이고, 함께 노예로서 서고, 걷고, 울고, 울부짖고, 아파하며, 통곡할 것이다. 우리가 예수를 노예로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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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사회학 강의 p.56 - 한국산업사회연구회 편


개신교

선교는 물론 단순 전도도 개별 외침에 비해 엄청난 파급력을 발휘한다. 땅밟기나 선교 여행, 일시적으로 많은 성도가 필요한 집회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물량은 개별 성도들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을 가능하게 해주거나, 부흥을 빨리 일어나게 해주며, 절기 집회를 놓치지 않게 해주는 등의 위력을 발휘한다. 이밖에 큰교회는 거대한 본당을 공동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줌으로써 헌금의 활용을 규모의 경제로 만든다. 10명 성도의 개별 예배에서는 10개의 골방이 필요하지만, 같은 교회 10명의 기도회는 1개의 본당만 있으면 충분할 것이다. 이러한 공동체 연대와 상승작용은 '성도의 사회적 생산력' 또는 '사회적 의례의 집합의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수교단 교회에서는 이 사회적 의례의 의식이 마치 담임목사의 능력인 것처럼 나타난다. 목사는 설교할 때 신앙이 가진 삶에서의 측면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으며, 성도는 이에 대해 간여할 수 없다. 결국 교회는 목사가 여러 성도들을 한 자리에 모아 예배를 인도하겠다는 결단과 그 실행을 계기로 이루어지므로 의례 그 자체의 집합의식이 마치 목사의 '내재적' 영성인 것처럼 나타난다. 


분석과는 다르다 분석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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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 눈을 감아 바라본다. 어디쯤에나 있으려나. 있어 본 적도 없고, 앞으로 있을 것 같지도 않은 그대의 이름을 그렇게 헤아려본다. 


그래도 실낱같은 빛이나마 꿰어 가기 위해, 그렇게 손을 얹었고, 그 아픔에 또 우리는 눈 멀어야만 했다. 그리고 다시 별빛만이 남았다. 


그리운 풀벌레소리 잦아들어 가는 안개 속에서, 또 한낮의 봄을 기대하지만, 결국 맞아오는 것은 희미한 번개, 천둥과 장마였다. 


구름 속의 물결들과, 바람 속의 추억들을 기대하며, 오늘도, 그만, 그대를 끄집어내고 만다. 더 이상 아름답지 않을, 아름다워야만 하는 나만의 그 마음들이여, 환영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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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명백히 서로 다른 것으로 보이던 인간현상이 동일한 형식의 개념으로 적절히 이해될 수 있다. 


예술사가들은 어떤 건축물도 순수한 형태로 "고딕" 양식이나 "바로크" 양식의 모든 요소들을 나타내지 못함에도 "고딕"이나 "바로크" 양식을 이야기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일단 도움을 필요로 하는 자로 인정되면 이전의 지위와는 다른 범주로 재분류되며 그들의 개인적 고통은 하나의 공적인 문제로 부각된다. 빈곤층은 그들이 어떤 행동을 하는가 - 사회적 범주화에 보통 사용되는 기준 - 에 의해 서가 아니라 남이 그들에게 어떤 행동을 하는가에 의해 규정진다. 사회는 빈자라는 사회적 유형을 만들어 놓고 실제로 그 지위 점유자는 소유하지도 않은 부정적인 속성 일변도의 특징을 지닌 독특한 지위를 그들에게 부여한다. 


집단의 조직, 정치적 이념이나 사상 등에서 표현되는 집단의 통합을 얻기 위해 구조와 개인 사이에 상당한 거리를 생기게 하는 희생을 치르지 않을 수 없다. 


대규모 집단은 그 성원들에게 많은 것을 요구하지 않으며 또 초개인적인 권력으로 개인이 직면하게 되는 "객관적" 구조를 만들어낸다. "개인적 요인을 마비시키고 일반적 요인을 마치 개인과는 상관없이 그 자체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또 실제로 개인에게 종종 적대적인 것으로 나타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 다수라는 사실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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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먼 옛날에 한 부자가 살았어요. 그 부자는 맘씨도 좋고, 주변에 베풀기도 잘하고, 심지어 신앙심까지 좋아서 어디 하나 흠잡을 곳이 없는 사람이었죠. 하나님께 헌금도 엄청 많이 드리고, 아낌없이 내어 바쳤던 사람이었죠. 알콩달콩 살고 있는 부인도 있었고, 7남 3녀의 많은 자녀들도 있는, 너무나 화목한 집안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그 부자에게도 나쁜 일이 하나둘 터지기 시작했어요. 들에 나가 일하던 자녀들이, 테러리스트들에게 죽었어요. 게다가, 자녀들이 관리하던 재산은, 천재지변이 닥쳐와서 모두 사라져 버렸죠. 게다가 맏형의 집에서 쉬고 있던 자녀들은, 그 집이 무너져 몰살당했죠. 이 모든 일들이 단 하루 만에 그 부자에게 전해진 소식이에요. 하지만 이런 비극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하나님을 찬양하였죠. 하나님을 원망하지도 않고, 참 대단한 신앙이었어요.


“주신 자도 여호와시오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 지어다!”


그리고 며칠 후, 그의 온몸에 피부병이 걸려버렸어요. 온몸에 부스럼이 나고, 간지러워 긁으면 아프기만 한, 너무나 고통스러운 병이죠. 하지만 그래도 너무 간지러워서, 쓰레기 사이에 앉아서 벽돌로 몸을 긁고 있었죠. 그 때 그의 부인이 다가와 말했어요.


“당신이 그래도 당신의 믿음을 굳게 지켜요? 차라리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시죠!”


“당신의 말이 어리석은 여자들의 말과도 같아요.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으니 재앙도 받을 수 있지 않나요?”


이토록 그의 믿음은 굳건했어요. 그의 믿음을 지켜 입술로 범죄 하지 않았던 것이죠.

그 후 그의 친구들이, 그가 재앙을 당했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어요. 하지만 멀리서 보아도, 가까이서 보아도, 오랜 친구인 그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변해버린 모습에, 소리 질러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옷을 찢었죠. 그 슬픔이 너무 커서, 땅의 모래와 먼지를 자신들의 머리에 뿌리고, 일주일동안이나 그의 곁에서 울고 있었죠.

그리고 더 이상 참을 수 없던 그 부자(이제는 부자도 아닌)는, 자신의 생일을 저주했어요. 자신의 생일을 저주하고, 하나님을 저주하고, 의로운, 정말 지극히 선하고 의로운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시련을 주는 신의 존재를 부정하였죠.

그러자, 그의 친구들은 갑자기 그를 비난하기 시작했어요.


“네가 무언가 잘못한 것이 있지 않아? 하나님은 정의로우신 분이시다. 네가 이런 고통을 겪는 것은, 네게 무언가 문제가 있기 때문 아닐까?”





...자 여기까지가 욥기의 절반의 내용입니다. 아시는 분들은 아시겠지만, 저 의로운 부자는 욥을 가리키죠. 뭐 그 주변이야 아직 나오기 전이니 별 상관 없겠죠. 나머지 내용은 요약하엔 내용이 너무 많으니 각자 읽어보세요. 42장을 요약하기엔 제 필력이 많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절대로, 하나님은 저 친구들의 말에 동의하지 않으실겝니다. 물론 욥의 말에도 동의하지 않으시지만, 결국 칭찬받는 것은 욥이죠. 신정론에 대해 매우 치밀하고도, 훌륭한 논리 구조를 가진 나름의 '신학 서적'이었던 욥기는, 지금에 와서도 충분히 유효하죠.


아래의 모든 말들은,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입을 통해 부정됩니다.

한 번 고민들 해봅시다.


'쓰나미를 당한 지방에는 죄가 만연하여서 주님이 벌하신 것이다'

'옷을 야하게 입고 다니면 성폭행을 당한다'

'네가 노력을 하지 않았기에 성적이 낮은 것이다'

'다른 사람을 탓하기 이전에 일단 너부터 잘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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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1. 개신교에서 신천지를 바라보는 입장


‘신천지예수교증거장막성전(대표 이만희, 이하 신천지)’은 혹세무민하는 교리와 반인륜적이고 반사회적이며 불법적인 포교활동 등으로 인하여 그 교도들을 전도에만 올인하게 함으로서 개인의 미래를 망치고 이혼과 가출을 조장하여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유사기독교로서 비밀 종교의 형태로 운영되는 반국가적인 범죄집단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국내 모든 교회에 소위 ‘추수꾼’이라는 비밀 요원을 침투시켜 성도들을 미혹하여 빼내거나, 목사의 비리 등을 조작하거나 이간질시켜 목사를 추방한 후 교회를 통째로 먹어버리는 소위 ‘산옮기기’라는 작전까지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2.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를 바라봤을 입장


'그리스도교(대표 바울, 이하 기독교)'은 혹세무민하는 교리(1)와 반인륜적(2)이고 반사회적(3)이며 불법적인 포교활동(4) 등으로 인하여 그 교도들을 전도에만 올인하게 함으로서(5) 개인의 미래를 망치고 이혼과 가출을 조장하여 수많은 가정이 파괴되는 등 사회적으로 큰 물의를 일으키고 있는 유사유대교(6)로서 비밀 종교의 형태로(7) 운영되는 반국가적인 범죄집단(8)이라 할 것입니다. 또한 국내외 모든 회당에 소위 '복음 증거자'라는 비밀 요원을 침투시켜 성도들을 미혹하여 빼내거나, 제사장의 비리 등을 조작하거나 이간질시켜 제사장을 추방한 후 회당을 통째로 먹어버리는 소위 '전도'라는 작전까지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로? 고리타분한 희년 논리 아니덥니까. 율법은 상식과 로마법 수준에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2)여성과 노예, 세리, 이방인, 죄인들과 한 상에 앉아 밥을 먹습니다.

3)종말론적 신앙은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4)거룩한 유대교를 뿌리부터 흔드는 기독교.

5)심지어 친구나 가족조차도 버리라고 말합니다.

6)교묘한 언약 해석에 넘어가면 안됩니다.

7)그들은 이 의례를 소위 '성만찬'이라고 부르지만, 이방인의 인육 의례와 비슷한 형태로 보여집니다.

8)예수란 '사람의 아들'이 다시 돌아온다는 '재림'은, '황제의 왕림'과 같은 용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분명히 반역과도 같습니다. 그들은 칼을 지니고 다니며, 거리와 광장에서 선동을 일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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