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르트헤이트 [Apartheid]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극단적인 인종차별정책과 제도.
모큐멘터리
mockumentary는  mock 과 documentary 를 합쳐서 만든 단어인데, mock의 뜻에는 '가장하다'라는 뜻도 있지만 '조롱하다'라는 뜻도 있다. 다른 말로 fake documentary 라고 부르기도 한다.
(용어설명 : 네이버 백과사전)

 영화 얘기한답시고 글을 쓰기 시작해놓곤 갑자기 왜 듣도 보도 못한 용어 설명하고 있냐고? 잘 읽어 놔.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야.
 다큐멘터리는 일반적으로 ‘사실’의 기록을 의미해. 하지만 그 기록이 정말 주관성이 배제될 수 있을까? 예를 들어서, 마이클 무어의 다큐멘터리 같은 경우는 주관성이 흐르고 넘쳐 마르지 않는 샘이거든. 거기까지 가지 않아도, 이미 카메라를 들이댄다는 것 자체가 이미 주관성이 담긴 행위야. 편집을 했든 안했든. 이런 현상을 아예 대놓고 비꼰 게 바로 모큐멘터리야. 다큐멘터리의 형식만 가져온 것일 뿐 주제 자체는 허구인 거지. 이 영화는 모큐멘터리의 정말 훌륭한 사례야. 외계인이라는 허구적인 소재에, ‘만약?’이라는 잣대를 가져와 ‘비웃자는’ 영화니까. 잠시 후 말하겠지만, 여기서 외계인을 흑인으로 바꾸어 버리면, 이건 정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니까 더더욱 모큐멘터리임이 빛을 발하지. 게다가 다큐멘터리의 형식인 만큼 ‘아 진짜 이렇 수도 있겠다...’ 싶어.
 영화는 끊임없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어. 당연히 주체는 인간이었지. 그런데 정작 관심과 시선은 타자를 향하고 있어.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억압받는 타자가 주인공인 거지.
 아 먼저, 주체란 ‘나 혹은 우리’ 를 뜻하고, 타자는 ‘너, 너희, 그, 그들’ 등을 의미해.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거야.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겠지.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그 본능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들어. 즉,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지.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이 위에 설명한 ‘격리’ 야.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에는 격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 이로써,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되지.
 영화는 여기서 다시 ‘만약?’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바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자야. 이건 뭐 거의 ‘에반게리온’ 에서 ‘롱귀누스의 창’ 같은 존재야.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존재. 그런데 그는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해. 이카로스의 욕심에 묻혀버리지. 여기서 모큐멘터리의 아이러니는 빛을 발하지.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악한’ 인간으로서의 주체와, 정말 ‘인간적’이고 선한 외계인들. 이것을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빌려 매우 강한 설득력으로 뇌리에 심어놓지. 영화는, 타자의 외침을 끊임없이 전달해. “살려줘!”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해.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주체들도 외치고 있어, “살려줘!” 라고. 자, 네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쩔 거야? 일단 살기 위해 쏘겠지. 그들도 똑같아. 살기 위해 타자를 억압하고, 죽이고, 실험하지. 그것이 ‘좀 더’ 라는 말이 생략될 수 없기에 천인공노할 짓거리가 되겠지만. 뭐 그럼 어때, 타자는 ‘실존’ 하는 존재가 아닌걸. 타자는 단지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야. 스타에서 미네랄 캐면서 죄의식 느껴본 적 있어?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껴? 만약 네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 거야. 그것이 바로 주체야.
 그런데 그렇게 ‘든든한’ 주체와 객체의 벽을 허무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었던 거지. 하이브리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이브리드. 너무나 바보 같고 착하고 정말 인간적인 욕심밖에 지니지 않았던 하이브리드.
 
총평

잡설이 좀 길었는데... 이 영화가 워낙 메시지가 세다 보니까 그려. 추천할 만하냐고? 아니. 역시나 이 영화는 잔인함 이전에 그 메시지 자체만으로 청소년 관람 불가야. 인문학도라면 강추 이상으로 ‘반드시’ 보아야 할 영화지만, 그 외에는... 글쎄...
 
추신
 
주인공이 넘흐 착하잖어ㅠㅠ 비커스 바보!!
Posted by 미노하
 스타트렉의 시작은 우주선이다. 아니, 우주 공간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미개척지, 우주. 그 곳에서 그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맞이한다. 스타트렉은 언제나 그렇듯이 매우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물질의 변환이 매우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로 자유롭게 우주 공간을 넘나든다. 물질의 변환도 쉬워서 돌맹이만 가지고도 식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스타트렉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처음부터 이들은 적과 조우한다. 미지의 적이며,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적이다. 배가 인간이라면, 적은 인간을 삼키는 짐승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절대적인 화력으로 자신들을 압도하면서 상대가 누군지에 대한 힌트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건 뭐 거의 ‘하늘’ 같은 존재이다. 대항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 타자에 대한 공포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처음에 등장한 우주선 ‘U. S. S. 캘빈’ 호는 자폭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한 생명이 태어난다. 죽음과 삶의 묘한 병치,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먹고 태어나는 아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 이름 - 제임스 - 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임스와 스팍 이렇게 둘로 축소될 수 있다. 제임스(영화상에서는 주로 커크라고 한다)는 문제아이다. 적성 검사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기는 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스팍’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처음부터 엘리트로 키워지며 모두가 인정해주는 천재이다. 이는 숙명적인 라이벌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초반의 영상 기법 상으로도 이들은 대조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매우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커크와 정 반대의 지적 능력 위주인 스팍.
 그들은 계속 충돌한다.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그들이다. 커크의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은 스팍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과 상극이다. 하지만 그런 스팍도 무너진다. 그의 별이 멸망하고, 그의 어머니가 죽는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의 장면에서는 오히려 부감(로우 앵글)을 활용하여 그의 무기력감을 강조한다(여담이지만, 이는 ‘시민 케인’에서 이미 써먹은 기법이다).
 그런데 그의 행성이 멸망할 때, 그 행성에 블랙홀이 생기기 때문에 멸망한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한때 유튜브에 떠돌았던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LHC(강입자 가속기)로 인한 지구의 멸망 루머. LHC로 인해 지구에 블랙홀이 생기고, 그로 인해 지구가 멸망한다는 루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떠돌았던 영상과 영화의 장면은 매우 흡사했다. 나는 그 순간 이 단어가 생각났다, 디스토피아. 이번 스타트렉은 디스토피아였다. 영화의 진행 내내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위아래가 아니라 수평이 아예 맞지 않았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미래가 가진 불안감과 위험성을 끝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신화에 대한 계몽의 도구로서 과학을 택했으나 과학 그 자체가 신화가 되어버린 세계. 과학이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닌, 적으로서의 타자가 되어버린 세계였다. 어쩌면 이것은 최근 헐리웃 SF/판타지 영화의 추세인지도 모르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크나이트’ 이다.
 하지만 절대로 이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커크, 그는 불가능에 도전한다. 작은 것으로 큰 것에 덤빈다. 결국 다시 한 번 실존주의이다. “논리는 접어두고,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라며 끝까지 과학에 대한 인간의 승리, 혹은 실존주의적 명제를 고수한다. 거대한 사회와 도전하는 개인. 이건 뭐 거의 ‘원더풀데이즈’ 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를 보는 것 같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는 구도도 그렇고 도전하는 대상의 위압감도 비슷하다. 게다가 결론마저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숙적의 대사는 처절하다. 주인공 일행은 적에게 대하여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 속에 죽겠다.” 라고 말한다. 이것을 영웅이 말하면, 보통 다른 영화에서 “지옥에서 보자.” 정도의 박력이 있는 말이어야 한다. 또한 그 후에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이 영웅이 받는 특혜이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었고, 그는 그냥 죽고 만다.
 여기서 우주선의 모양은 대부분의 경우 원의 모양을 취한다. 원은 하나의 세계이다. 즉, 배하나 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또한 원으로서 빛의 이미지를 전한다. 둥글게 퍼지는 빛, 우주의 어두운 곳에 대한 빛으로서, 계몽의 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의 우주선이 가진 형태는 매우 기괴하다.
 그들은 결국 다시 지구로 돌아오며, 메달을 보상으로 받는다. 또한 커크에게는 엔터프라이즈호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영웅이 받는 보상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다르다. 그들은 떠난다. 서부극에서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브리튼의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또 다른 모험을 위하여 떠난다. 사막의 끝에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위하여 다시 한 번 떠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이제, 모험의 시작(비기닝)이다.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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