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개인적으로, 고등학교 때부터 지리라는 과목을 매우 좋아했던 경험이 있다. 필자의 기억으로 미루어보았을 때, 고등학교 생활이란, 매우 답답하고 억압적인 공간(혹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지리를 공부한 사람의 눈으로는, 지도라는 것 자체가 나에게 다가오는 방식이 달랐다. 지도의 어느 한 점을 찍는 순간, 나는 그 곳에 있었고, 그 곳의 공기를 느끼며(기온, 습도, 풍향, 풍속 등으로 간접적이나마), 그 곳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지리학 자체는 사람을 연구하는 학문이었다. 물론 지질, 기후, 심지어 생물학적 관점까지 도입해야 하지만, 결국 그 주제는 땅이 어떻게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해 연구하는 것이다. 이렇듯이, 사람은 땅 위에 발을 디디며 살아간다. 아무리 경제학이 발달되어도, 지역적 거리감(혹은 그에 따르는 이동시간)이 고려되지 않는 이상, ‘바늘 끝 경제학이라 비판받게 된다. 인간의 육체적 한계가, 경제지리학의 근본 원칙인 것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육체라는 한계를 지니기 때문에, 시공간 속에서 사고(혹은 생활)의 방식이 결정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한계로 인한 인식론적 다양태(variation), 멀게는 각각 민족들의 신화(에스키모들에게 지옥이란, 영원히 축축하고 추운 곳이다. 히브리의 지옥이란, 불구덩이이다)로부터, 가깝게는 우리네들의 안방-창고로 이어지는 위계적공간 분화로까지 나타난다.

예를 들어 생각해보자, 우리가 수업을 듣는 공간 자체는 강의실이라는 속성이 부여돼 있다. 하지만 이러한 공간 자체에는 어떠한 의미가 내재적으로부여된 것이 아니다. 어떤 특정한 사회적 합의에 의해서 이 공간(space)’의 의미가 설정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 설정의 결과물로서, 우리에게 다시 영향을 미치는 것을 장소(place)’라고 부른다. 실제적으로 인간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주로 공간보다는 장소가 크다.

다산관이라는 건물 자체로만 본다면, 이는 분명 텅 빈 공터로 존재했어야 한다. 하지만 이에 대해 을 세우고 강의실만한 공간로 하여금 강의실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만든다. 공간에 벽을 세우고 구획을 나눔으로써, 의미 부여를 용이하게 만들고, 이에 따라 정말로의미가 재생산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지극히 자의적인 형태로 나타난다. 쉽게 생각해보자, 안과 밖의 구분은 누가 만들었는가? 우리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가? 아니면 그저 문이라 불리는 나무판을 밀고 두어 걸음 앞으로 나아가는 것인가?(이영도 단편 소설집 오버 더 호라이즌골렘챕터)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렇게 정해놓고살아가기 때문에, 그러한 안과 밖의 인식 체계가 우리를 다시 제약하는 것이다

Posted by 미노하

잉여가 뭐라고 생각해요? 다들 잉여라고 그러면 뭔가 부정적인 생각부터 가지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그렇게 보거든요. 잉여라는 말은 나머지라는 말과 동의어에요. 혹은 잉여라는 말을 순화하면 나머지라는 말이 되죠.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나머지 공부, 수치스러운 일이잖아요? 잉여 학점, 남들 다 가져가고 남은 학점을 내가 챙긴다, 부끄럽잖아요?

오래 전에 저희 집 책장에는 잉여인간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어두운 책 표지에, ‘남겨진인간에 대한 내용일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펴보지 못했던 책이죠. 사회에서 잉여가 된다... 그것은 분명히,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어요. 생각해봐요, 누가 여러분을 잉여라고 부른다면 기분 좋겠어요? 두려움의 대상인 잉여인데, 그 화살이 나에게로 향한다면, 그것은 분명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두려움도 반복되면 불쾌감이 되는 법이니까요.

서강대 사회학과에는 잉여라는 이름의 학회가 있어요. 학회의 목적은, 잉여라는 언어에 드러난 현대 사회의 문화 코드, 그리고 사회문화적 의미론의 분석이에요. 특히 요즘 그 학회에서는 잉여니스의 현상학이라는 주제로, 잉여라는 의미가 생산되고(혹은 외재화externalize) 다시 인식(혹은 내재화internalize)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잉여라는 말 자체가, 현대 사회의 많은 모습들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신뢰와 함께, 잉여라는 언어 자체의 의미가 재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죠.

이렇듯, 잉여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 코드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혹은 이러한 문화가 주로 확산되는 곳인 인터넷 공간의 문화 코드라고도 할 수 있죠. 인터넷 공간의 주된 향유자를 청년층으로 좁힌다면, 잉여는 청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거칠게나마표현할 수 있겠죠.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비웃어버리죠. 서로의 의미 없는(그것이 고의적으로 의미 없을지라도, 심지어 그것이 의미 있는 행동일지라도) 행동에 대하여 잉여짓이라고 칭하며 스스로들의 행동에 대해 쓴웃음을 짓는 거예요.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잉여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서로에게 잉여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거리끼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잉여라 칭하는 것을 기분나빠하면서 동시에, “그래 나는 잉여니까라는 자학적인 말을 덧붙여 버리죠. 청년 세대 자체가 스스로를 잉여라고 낙인찍어버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근데 왜 기분이 나쁠까요? 왜 잉여라는 말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할까요? 그건, 잉여란 말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 일거에요. 그렇다면, 이런 잉여란 무엇이며, 이들이 한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일까요? 먼저 잉여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 알아볼게요.

 

 

잉여(剩餘)[ː-]

명사

1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로 순화. 여잉(餘剩).

2」『수학나머지4의 전 용어.

 

 

일단 사전적 정의를 가져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의미를 구체화시키기 보다는 더 멀게만 느껴지게 만들었네요. 그래서 여기에 좀 더 설명을 덧붙여볼게요. 2번의 정의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1번만 설명해 보자면, 가장 먼저 남은 것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와요. , 이미 잉여가 아닌 것들을 통해 일처리를 다 했으니, 잉여는 일처리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죠. , 쓸모없는 존재가 되죠. 잉여가 아닌 것들은 이미 어떠한 위치가 부여됨으로서 사회 내에서, 특정한 쓸모를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잉여는 어떠한 위치가 부여되지 않아요. 사회, 조금 작게 표현해서 일처리를 수행하는 데에 어떠한 가치도 지닐 수 없는 것이 잉여라는 뜻이죠.

이렇듯, 사회는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서 잉여를 만들어내죠.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다고 생각해봐요. 끌과 정을 통해서, 대리석은 특정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나가죠. 그렇게 하나의 조각이 완성됩니다. 어떤 완결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조각이 말이죠.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완성된조각이 있기 위해서는 깎아 낸 나머지 조각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나머지 조각은 재활용이 불가능해요. , 나머지는 쓰레기가 됩니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호황기일 때도 결국 실업자는 존재합니다. 이는 완전고용 실업률, 혹은 자연실업률이라고 하죠. 경제활동인구의 3%정도만이 실업인 상태를 보통 완전고용상태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경제가 호황이 되어도, 이들은 결국 실업상태를 유지할 수밖에는 없어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기술이 발달하는 상황에서 더 심해집니다. 최근(이라기엔 꽤 지났지만) 등장하기 시작한 ‘20:80의 사회복지라는 논의들에서 잘 볼 수 있죠. 20%만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데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그들을 보조하는역할만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매우 안정적인형태로 스스로를 유지합니다. 여기서 80%는 잉여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인력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 속으로 편입되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백수의 상태로 내버려두며, ‘잉여라는 말로서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잉여가 됩니다. 청년기의 상태, 특히 대학생이라는 기간은, 사회로 나가기 직전에 거치는 일종의 모라토리움상태에요. 청소년기의 연장으로서 존재하는 이러한 유예기간은, 이미 독립했어야 하는 나이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여전히 학생으로 규정하여, 20에도 80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이들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서 복지의 대상이 되며, 사회에서 쓸모를 가지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적 시간에 속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구조주의의 논의를 직접 가져와볼게요. 사실 지금까지 했던 분석의 형태는 대부분 구조주의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형태가 필요하니까요. 구조주의란 세상을 이분법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개인의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일종의 내재적인(혹은 선천적인)’ 의지가 있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만들죠. 또한 만들어야 하고요. 그리고 여기에 실존주의 논의를 살짝 더한다면,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세상을 내 편너희 편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죠. , 모든 것을 주체와 타자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들은, 위험한 것이 되어 피해야 할 것으로 분류됩니다. 기독교의 성경, 특히 레위기 부분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나누는 부분에서 이러한 것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기존의 세계관으로 분류가 가능한 것, 즉 명백한 것은 먹을 수 있는 동물이지만,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존재는 부정하며 먹을 수 없는 존재이고, 또한 피해야 할 존재가 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대부분의 전통에서 무서운 대상(혹은 경외의 대상)들은 보통 이런 중간자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로, 귀신을 볼까요? 이들은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들이에요. 미노타우르스는 인간과 소의 하이브리드고 말이죠. 이러한 중간자적 존재들은 배척당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세계관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니까요.

이러한 분석법으로, 대부분의 신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조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 되는데요, 구조주의는 Theory of Everything 이기 때문에 동시에 Theory of Nothing 도 될 수 있죠. 하지만 일단 분석의 도구로서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자주 쓰이며, 그만큼 많이 비판받게 되죠. 이러한 구조주의적 분석은 신화에 대한 분석을 뛰어넘어, 최근 영화에 대한 분석의 도구로써도 많이 사용됩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어. 당연히 주체는 인간이었지. 그런데 정작 관심과 시선은 타자를 향하고 있어.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억압받는 타자가 주인공인 거지.

아 먼저, 주체란 나 혹은 우리를 뜻하고, 타자는 , 너희, , 그들등을 의미해.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거야.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겠지.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그 본능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들어.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지.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이 위에 설명한 격리.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에는 격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 이로써,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되지.

영화는 여기서 다시 만약?’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바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자야. 이건 뭐 거의 에반게리온에서 롱귀누스의 창같은 존재야.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존재. 그런데 그는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해. 이카로스의 욕심에 묻혀버리지. 여기서 모큐멘터리의 아이러니는 빛을 발하지.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악한인간으로서의 주체와, 정말 인간적이고 선한 외계인들. 이것을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빌려 매우 강한 설득력으로 뇌리에 심어놓지. 영화는, 타자의 외침을 끊임없이 전달해. “살려줘!”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해.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주체들도 외치고 있어, “살려줘!” 라고. , 네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쩔 거야? 일단 살기 위해 쏘겠지. 그들도 똑같아. 살기 위해 타자를 억압하고, 죽이고, 실험하지. 그것이 좀 더라는 말이 생략될 수 없기에 천인공노할 짓거리가 되겠지만. 뭐 그럼 어때,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닌걸. 타자는 단지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야. 스타에서 미네랄 캐면서 죄의식 느껴본 적 있어?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껴? 만약 네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 거야. 그것이 바로 주체야.

그런데 그렇게 든든한주체와 객체의 벽을 허무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었던 거지. 하이브리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이브리드. 너무나 바보 같고 착하고 정말 인간적인 욕심밖에 지니지 않았던 하이브리드.

 

 

다시 경제논리로 돌아와서, 20의 위치이든 80의 위치이든 결국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청년기의 사람들, 혹은 백수들은, 그 어떤 위치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타의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라는 일종의 의례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하고 월급을 받는 것, 그러한 삶의 반복은 의례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모두 일하고 있다는 그런 일종의 동시성에 대한 믿음은, 일하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집합적인 주체의식을 만들어내죠. 그리고 2080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잉여가 되어, 일종의 위협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위협이라는 용어가 뭔가 탐탁지 않다면, ‘불만거리라는 용어도 괜찮을 것 같군요.

구조 안에 편입되어,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잉여들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 트위터에서 있었던 세대 갈등의 형태에서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히 영웅주의적 꾸중의 이중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40, 즉 과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던 영웅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잉여세대라는 자들은, 영 못마땅하게만 보이겠죠. 그들이 보기에, 지금의 사회가 가진 모순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불만거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청년기란 성인이 되기 이전의 유예기입니다. , 성인들이 가질 수 없는 정치적 관념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현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여할만한시기가 되는 법이죠. 이것은 전후 독일의, 낭만주의적 세대 관념, 우리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을 잘 기르자.”라는 주장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전부 잉여라는 것이 사회 내에서 만들어지는방식에 대한 구조주의적 서술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에서의 집단의례(혹은 집합의식)을 통한 구별짓기에 불과합니다. 잉여라는 구분법조차 결국 개개인들이 외재화시킨 관념인데, 이것을 개인들이 객관화시키면서, 스스로가 잉여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숙명적인 것으로만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논의는,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러한 구조라는 것이, 태초부터 존재하던 것일까요? 모든 개인에게는 원래 잉여라는 관념이 존재했을까요? 이에 대해서, 정 반대 방향의 분석을 해볼게요.

한 번 물어봅시다. 게임 좋아하세요? 아니면 뭐 취미 같은 것을 생각해볼게요. 취미활동 그거, 왜 하세요? 자기 계발? 그거 하면 뭐 돈 들어오나요? 뭐 그런 것들을 목표로 해서 취미생활을 하시는 분도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저는 사진을 찍습니다. 뭐 글 쓰는 것도 취미로 하구요. 저는 이런 활동들을 왜 할까요?

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동일합니다. 게임 왜 하냐고요? 재밌으니까요. 사진? 글쓰기? 학회? , 재밌으니까 합니다. 잉여도 동일합니다. 잉여라는 어감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짝만 말을 바꾸면 잉여는 쓰레기가 됩니다. 잉여짓은, 아무리 잘 봐줘도 헛짓거리이상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말하죠. 주류에 편입될 여지는커녕, 그 가능성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잉여죠.

실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니체의 위버맨쉬, 영어로는 over-man 이 있죠. 실존은, 쉽게 생각하자면, 생존입니다. 즉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 실존이죠. 인간이란 것 자체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주변을 공작하게 됩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생존할 수 없는 단위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수많은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실존이라는 용어를 꺼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니체의 용어에서의 초인이란, 강한 능력을 지니고, 모든 것을 이겨내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초인은 다만, 우리와 함께 살며, 모든 일들을 견뎌 내는사람이죠.

이런 실존의 사례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멋있거든요.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에 맞서는 자세. ‘이라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말이죠. 물론 그것은 분명 무리한 도전일 뿐이며, 성공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데다가, 실패할 것임이 분명한 길이기 때문이죠.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성공하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런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요.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을 준다는 것,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무한 도전이라는 예능프로그램만 봐도 나타나죠. 영화같은 데서도 이와 관련된 명대사가 많잖아요. 스타트랙의 논리는 접어두고,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라든지. 많은 영화(특히 최근 등장하는)들의 논리가 이렇죠, “생각하지 마, 일단 즐기는 거야!”.

어쨌든 다시 잉여 문화로 넘어오자면, 이렇습니다. 타칭 잉여라 불리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명상하고 있나요? 잠만 자요? 아닐걸요? 이들의 대부분은 DC 나 트위터, 오유, 엔하위키 등의 곳에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뜻이죠.

저는 이것을 잉여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 왜 해?” 라는 질문에 대해, 뭔지 모를 당당함으로 그냥!” 이라고 외칠 수 있는 그 자신감 말이죠. 스스로가 잉여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가지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일종의 예술적 가치로서 끌어올리는 것이 이러한 잉여라는 것이죠.

 장기하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혹시 인디 밴드 알고 있는 것 더 있나요? 그럼 한 번 더, 인디 밴드의 정의를 내려주실 분?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사람? 그렇다면 서태지도 인디에 속해야 합니다. 아 물론, 저는 서태지를 인디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뭐 자본력의 문제야 존재하지만, 원론적인 정의는 그것이니까요. 신해철의 경우를 볼까요? 정작 신해철... 선배님은 아니죠? 신해철은 음악 전공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게 재밌어서 하다 보니 그게 직업이 된 케이스죠. 여담이지만, 그냥 피아노로 도미솔을 쳐보고 나서 그게 뭔가 소리가 예쁘게 들려서 감동했다는 일화도 있죠. ...그래서 나온 곡이 그대에게라더군요.

다시 장기하로 돌아와서, 그가 있는 소속사는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입니다. 즉 본인이 하는 음악딴따라질이라는 말로 격하시켰죠. 하지만 그 누구고 그에 대에 뭐라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본인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랑스럽겠죠. 속된말로, 좀 비속어를 섞어서 말하자면, ‘병신 같지만 멋있어라는 말이 있죠? 그것이 바로 실존적인 행위 주체, 혹은 예술적인 잉여짓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잉여들은 이 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들(혹은 잉여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존재 자체는, 지금의 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위의 영화 분석에서 사용했던 살려줘!” 라는 외침일까요? 아니면 종교집단에서와 같이 오오 믿습니다 오오오.” 라는 식으로 현재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에이 설마.

잉여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향해 짱돌을 던질 힘, 심지어 살려줘!”라고 외칠 힘도 없는 이들이 바로 잉여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일상적 실천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며, 공작인임과 동시에 유희적 인간의 모습을 버리지 않고 생존하고 있죠.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판명난 이 잉여들. 차라리 그냥 생존의 기반을 모두 빼앗겨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죠. 아니, 하소연할 기운도 없고, 애초에 하소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구조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잉여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작은 벌레들은, 하늘을 향해 서로가 서로를 밟고 기어 올라가려고 하고 있죠. 이들이 바로 잉여입니다.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여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낸 나비는 잉여가 아닙니다. 그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회에서 성공하는, 그리하여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엘리트인 것이죠. 진짜 잉여들은 탑을 쌓은 벌레들일 것입니다. 정 비유하자면, 꽃들을 대기업으로, 벌레들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지만, 결국 다시 그 하늘에 오르기 위해 계속 그 탑에 있는... ‘벌레들일 것입니다.

잉여 자체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완충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스스로의 위치에게 부여되는 기능이 그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물론 지금까지 미뤄져 온 일이지만, 스스로에 위치에 대한 자각을 통해, 현실로 변혁을 이루어내는 혁명적 계급으로 작동할 수 있죠. 그렇기에 잉여는 위험한세대이며, 동시에 아직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벌레들에 불과하게만 보입니다.

그런 잉여들조차도, ‘구조에 대한 작은 반항을 시도합니다. 승산?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 있어 보이나요? 그렇다면, 세상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군요. 어차피 희망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하게 질러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잉여 자체의 사회적 기능을 잉여들 스스로가 부여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잉여는 잉여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미노하

이 글은, Do immigrants threaten the national culture and identity? 란 질문에 대해 답한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물론 일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동정심이나 통계학적 의미로써 분석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많아지면 집단 내부의 다양성은 증가한다. 그리고 그러한 다양성은, 물론 이전의 그 무엇과는 다를 것이다. 쉽게 생각하자, 변화는 변화를 부른다. 큰 변화에서 작은 변화이든, 작은 변화에서 큰 변화이든. 이주자들의 수는 분명 증가하고 있다. 또한, 그들에 대한 문화의 변화도(외형적이든 내형적이든) 분명히 일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그렇다면, 그 인식은 어떠한가?

길을 걸어가고 있다고 생각해보자. 갑자기 어떤 외국인이(흑인이나 짙은 황인 계열의) 길을 물어오는데, 자신이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로 이야기한다. 그런 상황에서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무엇이겠는가? 물론 자신이 아는 언어(한국어나 혹은 영어라도)라면 친절하게 답을 해 줄 것이다. 하지만 전혀 알 수 없는 언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일반적이 사람들의 가장 적절한 반응은, ‘도망일 것이다. 이것은 잘못이 아니다. 단지 두려움에 기인한, 매우 자연스러운 반응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가 알 수 없는,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한 반응은 두려움이 가장 보편적이다. 물론 그러한 감정을 즐기는 많은 모험심 넘치는사람들이 존재하기는 하겠지만, 그들은 많은 소수중 하나일 뿐이다. 대부분의 적은 다수들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무지에 대한 공포는 기본적인 생존관념에서 기인한 것이므로, 그러한 행동을 백안시할 수 있는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하지만, 그것을 집단적인 공포로 확대하여 하나의 진실이며 순리인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경우가 문제일 것이다. 이에 대한 예시는, 조금만 과거로 올라가서 2차 대전 시기 유대인 디아스포라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당시 독일의 경우, 1차 대전 패배의 경험과 그로 인한 배상금 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엄청난 부담감을 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화려한 영광의 시절은 이미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으며, 의견 통일은커녕 국가 관념조차 생겨나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삶이었다. 그런 그들에게, 히틀러라는 영웅이 등장하였고, 괴벨스의 언어를 통하여 대중을 휘어잡았다. , 난세의 영웅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 번 일어날 만한 원동력이 필요하였다. 꼭 실제적일 필요까지는 없었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 민족이었다. “아리안족은 위대하다.” 라는 명제는 꼭 증명될 필요가 없었다. 민족이 실재하는가? 알 필요 없다. 그들을 위대하지 않게만든 이 분명히 존재하니까. 그것은 유대인이었고, 3세계에 대한 착취를 통해 힘을 키운 타 유럽 민족들이었다. 절망에 빠져 있던 독일인들은 목표 의식을 부여받았던 것이다. 그런 일은 매우 쉽게 일어난다. 대중을 움직이는데 필요한 것은 100%의 진리가 아닌, 1%의 진실이니까. 그들에게는 단지 적이 필요했고, 그 훌륭한 대상으로서 선택된 것이 언제나 유럽인의 적이었던유대인이었을 뿐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게 시작된 것이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이다.

하지만 민족이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실재하는가? 민족이라는 관념은, 단지 자본주의 사회로의 이행 과정에서 나타난 것이다. 자본가들의 필요성에 의해 중앙집권적인 형태의 근대적 국가가 나타났고, 그러한 권력의 정당성을 민족이라는 관념에서 가져온 것이다. , 민족은 단지 개념적으로 존재하는 밈meme일 뿐이며, 실재적으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민족이라는 개념은 지극히 가까운 과거에 형성된 것이다.

한국은 아직도 IMF 의 상처에서 아직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다. 수많은 청년 실업자들은 표류하는 삶을 계속 이어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자조하며, 사회 구조에 대한 비판은커녕 주류에 편입되는 것조차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청년 세대뿐만 아니라, 장년과 노년에 이르기까지, 누구도 안정감은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들은 분명, 이러한 상황들을 만들어낸 것에 대한 책임을 물으려 할 것이다.

이러한 책임 추궁에 대해서, 언론과 대기업 등의 엘리트 집단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만한 도구를 많이 가지고 있다. 또한, 그들을 달랠 만한 당근도 얼마든지 있다. 그렇기에 이러한 공격성은, 우리 주변의 많은 소수자를 향할 것이다. 이것은 분명, 위험하다.

이제 다시 한 번 결론을 지어 보자. 가장 중요한 문제는 질문 자체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과연 그것을 위협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변화에 대한 공포는 비난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을 위협으로 표현하며 무조건 거부하려고만 하는 것은 단지 또 다른 광기의 한 형태일 뿐이다.

과학이 계몽시킨 전근대 사회는, 다시 한 번 과학 자체가 이 되었다. 그렇게 근대는 계몽을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한 계몽은 일어나지 않았고, 민중은 편한 마음으로 폭력을 행할 수 있었다. 그것은 과학이라는 미명 아래 이루어지는, 통계와 이론으로 정밀하게 계산된, 폭력이었다.

단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배척하는 것, 외국의 문화가 유입되고, 그로 인하여 우리의 순수성더럽혀진다고 생각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협으로 느끼는 것. 그러한 생각 자체가 바로 폭력이다.

교통과 통신의 발달은, 필연적으로 자본의 힘이 국가의 통제력 수준을 벗어나게 된다. 그러한 상황에서, 변화는 당연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이주에 의한 것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 문화는 사람이 옮기는 것이므로, 이주에 의한 문화 변화가 매우 클 것이라 확신한다. 그러한 현상은 멀게는 기자 조선이 그러하였고(기자조선의 존재 여부는 불확실하지만), 가깝게는 일제 강점기가 그러하였다.

그렇게 문화는 변한다. 변한다는 것이 좋을 수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다양성이 증가한다는 것이다. 다양성의 증가는, 분명 좋은 점이 더 많다. 그리고 그것은, 위협이 아니다. 그것은 변화이며 변동이고, 결국 그것은 어떤 면에선 기회로서 주어질 것이다. 나는 그렇게, 두려움을 기대해 본다

Posted by 미노하
 나는 지난 9월 12일 혜화동을 방문했다. 그렇다. 많은 사람들이 ‘대학로’ 라는 이름으로 알고 있고, 나도 그 이름을 유흥의 공간으로써 향유하는 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 때는 조금 달랐다. 다른지는 몰랐다, 몰라야 했다. 우리는 그 곳으로 답사를 나갔다. 그 곳에 일종에 ‘필리핀 공동체’ 가 있으며, 그들의 문화를 한번 직접 마주해보라는 것이 이유였다.
 처음 출발은 그리 순조롭지 못했다. 혜화역에 도착했을 때, 언제나처럼 익숙한 분위기만이 나를 반겼다. ‘여기서 대체 무슨 새로운 것을 느끼라는 거지?’ 라고 불평하며 나는 길을 헤매고 있었다. 결국, 길은 물어 가는 것이 정답이긴 했지만……. 동성고 앞에 도착했을 때, 우리 수업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들 헤맸음이 틀림없다. 어쨌든 그렇게 우리들은 그 곳에 모였고, 대략적인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그 설명을 통해 그 곳이 어디라는 것을 듣게 된 후에야, 우리는 이미 환상 세계에 들어와 있었음을 알았다. 그곳은 쉽게 말해, 한국이 아니었다. 물론 그 곳 역시 한국 내부에 있고, 한국인들이 살고, 생활하고, 발을 딛는 공간space이다. 하지만, 절대로 한국이라는 장소place는 될 수 없는 곳이었다. 그것이 한국인에게든, 필리핀인에게든. 그 곳에서 내가 기대했던 한국적인 삶의 모습은 그리 기대할 수 없었다. 한국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가지고 있던 우리들은 그 곳에서 이미 마이너중의 마이너가 되어 있었고, 필리핀인들은 메이저로서 군림하고 있었다. 
 장터에서는 필리핀 사람들이 필리핀 음식과 농산물, 장난감등을 팔고 있었다. 물론 영어도 아닌 필리핀 언어(타갈로그어라고 했다)로. 장터의 경우 내가 갔을 때는 많이 축소되었다고 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나에게는 충분히 신선한 장면이었다. 그리고 좀 더 들어가면 혜화성당이 있었다. 그 곳에서는 주일마다 타갈로그어로 미사를 드린다. 그 미사를 위해서 서울, 경기, 인천 등지에서 많은 필리핀 사람들이 모인다고 한다. 우리가 그 곳에 갔을 때, 언어는 필리핀어로 하되, 자막 등은 영어로도 표기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서 자세히 들어가 보지는 못했다. 길 건너편에는 우리은행이 있었다. 그곳은 다른 영업점과는 다르게, 주일도 영업을 한다. 아무래도 주일마다 오는 필리핀인들의 편의를 위해서였던 것 같다. 듣기로는, 그 곳 2층에는 필리핀인들을 위한 편의시설을 갖추어 놓았다고 한다. 송금 업무가 그 은행의 가장 주된 업무인 것 같았다. 
 질문지 문항을 받아오긴 했지만, 그들과 대화할 때 그것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좋지 않은 선택이었다. 아무래도 대화의 폭이 좁아지게 되고, 그들에 대한 전체적인 이해가 거의 불가능해지기 때문이었다. 어쩔 수 없이, 짧은 영어를 동원해서 이리저리 대화를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때, 나는 또 다른 신선함을 느꼈다. 그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그들도 사람이었다.” 라는 것. 그들을 만나기 이전에 필리핀인이란, 내겐 단지 숫자에 불과한 존재였다. 그저 필리핀에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기 위해 온, 3D 노동자였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과의 대화는, 그것뿐만이 아님을 강하게 드러내었다. 
 첫 번째 만났던 사람은, 근처 공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나마 예상대로였다. 5년 정도를 일하고 다시 본국으로 돌아간다고 하였고, 동료 문제가 가끔 힘들게 할 때가 있다고 했다. 비자 문제에 대해서는 강하게 “No” 라고 하는 것으로 봐서, 우리의 말실수였음을 깨닫게 했다. 아마도 그들에게는 껄끄러운 문제였으리라. 그렇게 첫 번째 인터뷰는 무난하게 끝났다. 
 거기서 용기를 얻은 나는, 두 번째 인터뷰를 시도했다. 하지만 두 번째 인터뷰는 실패나 마찬가지였다. 라포Rapport 형성 자체를 실패했기 때문에, 대화 자체가 거의 이루어지지를 못했다. 물론 대화를 나누긴 나누었지만, 우리가 충분히 기대할 수 있는, 혹은 전혀 의미 없는 대답만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그들은 경계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이 여기 있는 것 자체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결국 약간은 의기소침한 상태로, 세 번째 인터뷰는 한국인을 대상으로 했다. 미사가 드려지는 성당의 행정 직원이었다. 그들의 대답은 의외였다. 대충 요약하자면... “우리는 그들에게 단지 장소만 빌려 줄 뿐이다. 사실 노점상 하는 것도 별로 달갑지는 않은데, 통행에 방해가 되고 교인들도 별로 좋아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즉 그들이 마음에 들지만은 않는다는 뜻이었다. 사실, 필자의 교회(개신교)에서도 그런 예배가 있는데, 그것을 별로 좋게 보지 않는 경우도 많다. 행정 하는 사람의 입장은 어딜 가나 동일한 것이다. 여기서 든 하나의 생각은 ‘과연 이것을 교회Ecclesia라 할 수 있는가.’ 이었다. 주님의 이름으로 모인 이들이었다. ‘디아스포라’ 라고 할 수 있는 모임을, 똑같이 귀한 ‘하나님의 형상Imago Dei’ 들이었건만, 그것을 보지 못하는 모습이 너무나도 안타까웠다. 그것이 우리 한국인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들에 대한 정보가 많이 부족했기에, 몇 사람의 인터뷰를 더 해야 했다. 그 다음으로 인터뷰한 것이, 그네에 앉아서 놀고 있던(진짜다) 한 청년이었다. 아무래도 친구를 기다리고 있는지(혹은 그냥 사람구경하고 있는지) 그네타기에 열중한 표정이었다. 그와 몇 가지 문답을 나누긴 했지만 딱히 특이한 대답은 별로 없었다. 그냥 소득 반 정도를 보낸다든지, 하루 몇 시간을 일하고 얼마나 번다든지, 많이 벌 수 있어서 한국에 왔다든지 하는 것이었다. 다만 고향이 그리운가 하고 물었을 때, 쓰게 웃던 그 모습을 도저히 잊지 못한다. 곤란한 질문을 던질 때도 환하게 웃으며 대답해주던 그분이, 그때만은 얼굴에 그늘을 지우지 못하였나보다. 
 마지막으로 인터뷰했던 분이 가장 특이하긴 했다. 신혼여행으로 한국에 왔으며, 온 지 3일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고 했다. 그래서 아직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고 할 뿐이었다. 물론, 그것을 믿느냐 안 믿느냐는 나중 문제겠지만... 어쩌면, 나의 경험 미숙으로 인해 그들에게 더 편안하게 다가가지 못했던 것이 원인일 수 있었겠다. 
 그들과 대화하면서 느꼈던 신기하면서도 안타까웠던 것은, 그들은 최소한 대학 졸업 정도는 하고 왔다는 사실이었다. 그렇게 대학까지 나와서, 여기서 하는 일은 공장일이라니... 어떤 면에서는 참 낭비라고 생각됐다. 어쩌면 70~80년대의 한국인들도 이러지 않았을까? 경제 개발기, 아메리칸 드림을 품고 미국에 왔던 이들의 모습 말이다. 한인촌에 모여 살며, 조금이나마 서로의 ‘공기’를 느끼기 위해 모이려고 했던 그들. 나는 그것과 동일한 모습을 혜화동 로터리, 그 작지만 큰, ‘혜화동 필리핀 공동체’에서 느낄 수 있었다. 
 각자 한국에 올 때, 가지고 왔던 꿈들은 모두 달랐을 것이다. 어떤 이는 가수로서 한국에 왔고, 어떤 이는 건축사로서, 교사로서... 하지만 그들이 이곳에 왔을 때, 그들은 거대한 현실의 벽에 부딪혔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행정가’ 로서의 시선. 그들은 단지 부려먹기 좋은 값싼 노동력에 불과했다. 한국에서 생활하며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원하던 일과 조금이나마 비슷한 일을 할 때쯤, 그들에게는 송환 명령이 떨어진다. 그렇게 그들은 ‘원칙적으로는 불법인’ 생활의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이다. 그 삶은 그들을 외로움으로 몰아넣고 닦달하고 있었다. 한국 사회라는 거대한 단체 앞에, 개인으로서의 그들은 너무나 작은 존재였을 것이다. 
 어쩌면 그러한 ‘가톨릭’ 이라는 존재가 조금이나마 그들에게는 결속력으로써 작용했을 것이다. 종교란 참 무서운 것이다. 사람을 움직이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되는데다가, 사람들을 뭉치게 하는 데는 더욱 강하게 작용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톨릭은 그 결속력이 더욱 강하다. 원칙적으로 가톨릭의 종파는 단 한가지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들은 하나의 ‘집합체’ 로서 ‘권력power’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가톨릭교회는 이민관련 업무라든지, 송금업무, 심지어 의료봉사까지 담당함으로서, 그 역할을 훌륭히 담당하고 있었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이런 가톨릭교회의 응집력은 개신교 신자인 필자로서는 굉장히 부러운 부분이다. 
 조사를 마치고 오기 전에, 그 노점에서 필리핀 음료수 캔을 하나 사 마셨다. 무언가 거북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맛이 매력적이었다. 그 거북함이 좀 강했는지, 다 마시는 것은 힘들었다. 그렇게 길을 건너 건너편 롯데리아에 왔을 때도 필리핀인들은 많이 있었다. 심지어 우리와 인터뷰했던 그 ‘해맑은’ 청년도 와서 그의 친구들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물론 그는 우리를 알아보지 못했다. 거기서 다른 학우들과 조사했던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가 알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그들은 꺼내 놓았다. 사실 그 병아리 요리는 매우 인상적이었다. 
 그렇게 그 날의 답사는 끝이 났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동성고등학교 입구를 지나자마자 느껴지는 그 ‘한국의’ 공기는, 다시 나를 낯설게 했다. 길에 한국인이 더 많다는 것. 노점상에서 떡볶이와 튀김을 판다는 것. 영어나 타갈로그어보다 한국어가 더 많이, 아니 한국어만이 들린다는 그 작은 사실. 그것들 하나하나가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분명 10m 정도 밖에는 차이나지 않는 공간이었다. 그런데 동성고 입구를 점이지대로 하여, 그 곳은 ‘다른 나라’ 나 마찬가지였다. 익숙한 풍경에 낯설음이 느껴지는 것, 1학기 때 배웠던 ‘인류학 개론’에서 그렇게도 중시하던 내용을, 한 학기동안 배웠던 것을, 나는 그 날 하루 몇 시간 만에 모두 느꼈다. 
 그리고 우린, 너무나 익숙한 것처럼, 지하철 카드와 함께 한국으로 돌아왔다.
Posted by 미노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물었을 때, 대부분의 동양인이라면 네 앞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학교도서관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인(혹은 서구의 철학에게 묻는다면)이라면 어떠한가? 아마도 지금, 여기에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여기. 혹은 Now-Here.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멀리는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가깝게는 우리네 영화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명령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물론 이 두 개의 구절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곧 비서구 문화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여기에, 기독교와는 다른 방향이지만, 다위니즘이 섞인다면 이는 어긋난 동정심으로 작용하게 된다.

산업혁명기, 자국 내의 발달이 극에 이르러 새로운 소비 시장이 필요해진 서유럽의 국가들은,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세계에 나갔을 때 보았던 것은, 충격의 장면 들이었다. 자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비서구인의 생활양식. 너무나 불결하며’, ‘비참하고’, ‘가난한그네들의 삶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일명 백인의 의무라는 것을 앞세워 좀 더 진화한 우리들이 진화하지 못한 비 백인들을 구제해야 한다.” 하는 인도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은 환경결정론, 문화 진화론, 문명 등의 용어로 대체되어, 비서구 사회를 개척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좋은 환경은 좋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이 생긴다. 그것이 개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열등한문화를 가지고 있을 자들을 위해, ‘우수한환경에서 우수한 문명을 전해주러 가는 것이다. 물론, 대포와 기병을 앞세우고. 뭐 거기서 경제적 부가 창출된다면 그건 당연한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러한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문명에는 우열이 없다. 아니,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문명이라는 말은 없다. 야만인(barbaric)도 없다.

서구인들이 비 서구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하나둘 믿지 못할 발견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이미놀라운 문명이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가 더 열등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라미드가 있었다,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담긴. 거대 고산 도시가 있었다, 자신들도 실행할 수 없었던 복지 사회의 정신으로 세워진. 조금 더 고산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기원전에 세워진 그 도시에는, 엘리베이터와 상·하수도, 3~4층의 아파트가 있는 계획도시였다.

물론 이러한 것은 나중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두 권의 책에서는, 아직 제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근대화라는 환상이, 환상이 아닌 현실로서 살아 숨 쉬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매우 훌륭한 지지(地誌)서이다. 당대 한국의 상황에 대한 현대사적 서술은, 식민지로서의 한국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이 묘사하고 있다(물론 당시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관찰하는 꽤나 객관적인 시선은 한국 사회를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사실은 우리나라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라는 것이다. 한국은 과연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할 정도로가난했다. 국민들은 순박하기만 했고, 부정부패와 수탈로 인하여, 피착취 계급은 근면의 목적조차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소독과 같은 의료적 지식은커녕 기본적인 위생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 관료들은 행정적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척도로 평가받았고, 엽관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자발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습의 폐단은 영원한 어제속에 갇혀서 변동의 가능성조차 차단해 버렸다.

여기까지가 이사벨라(혹은 대부분의 서양 학자들)의 관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조금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개방성이라는 사상은 조선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모내기법의 확대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농민들은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서는 돈을 먼저 지불하고 물품을 주문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광산은 민영으로 운영되었고,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시장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고, 동전 화폐뿐만 아니라 신용 화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거기까지였다. 비변사의 너무나 막강한 권한과 함께, 세도 정치로 인해 생겨난 귀족 계급은 상업 자본의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일본은 이미 서구의 문물을 (외형상으로는)완전히 받아들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사상마저 그들의 스승(영국)에게 잘 받아들인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정하기 힘든 학문적 정론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쉽게 쓰이는 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식민지가 되었던 덕분에근대화가 된 것이 아니다. 다만, 식민지 형태로근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한국의 경제적근대화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한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국가인가? 아니, 정말 근대화란 좋은 것인가?

여기서 일그러진 근대를 보자. 일본은 매우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개방성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다른 문화가 일본에 들어올 경우, 일본은 그것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자기화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섬이라는 특성으로 인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방이라 볼 수 있다.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국가라는 사실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근대화(혹은 서양화)되지 못했다. 한국인에 대한 가혹한 식민 정치나, 경찰 권력의 폭력성 등은 서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서구 국가에서는 이들을 보고 그래봤자 야만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의견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필자가 한번 물어보겠다, 한국은 과연 근대화된 국가인가? 서양은 진정으로 근대화되었는가? 필자는 근대화를 이렇게 규정해보겠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사회의 보편적인 담론을 구성하는 것.” 이렇게 본다면, 아직도 한국에서는, 아니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진정으로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오리엔탈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언어를 사용한 비판이다. 비판을 통해서 상대와 나를 구별 짓는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나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분명 생존의 논리이다. 타자들도 분명히 살려줘!” 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체가 먼저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들도 외치고 있다, “살려줘!” 라고. , 그대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일단 쏘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것이다.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스타에서 미네랄 캘 때 죄책감을 느낄 리는 없다.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끼는가? 만약 그대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주체이다.

다만 그 생존의 논리가 정치적 논리로 확대되어 오용될 경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일본에 대한 야만적이라는 비판은 일본마저도 아시아의 국가임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담론을 낳았다. 이러한 것은 당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싶다. 이 무슨 마초스러운 발언인가. 그렇다면 서양은 남성이고 동양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뜻인가? 저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저 문장이 바로 남성주의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의 결정체이다. 서양인에게 있어, 동양은 신비로움과 부드러움, 보물들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인은 동양인들을 계몽하고 다스리며 복속시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성, 그렇게 다시 계몽의 목표물이 되었다. 이제 다시 계몽을 계몽시켜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Posted by 미노하
아직 희망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걸었다
길은 어두웠고
등대는 점점 희미하게만 비추어갔다
함께 걷고 있었고
잡은 손 아직 놓지 않았다
어둠을 보았다
희망은커녕 절망조차 보이지 않는다 했던가
다행히도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제 절망은 볼 수 있다
어디로 갈 지 알련다
도망치고 다시 달려들어
이제 다시
그저 걷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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