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강대'에 해당되는 글 5건

  1. 2011.07.24 0401 보이스포럼
  2. 2011.07.23 사회발전론 기말고사
  3. 2011.07.20 잉여에게 희망을
  4. 2011.07.17 정치학개론 독후감
  5. 2011.07.08 사회학개론 에세이

아 혹시 인류학개론 들으신 분 있나요? 그럼 말이 편해지는데.. 없나요? 그냥 제가 설명할게요.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설명하고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비는 왜 옵니까? 그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고대에는 이런 과학적인 이론들을 아마 몰랐겠죠. 그래서 뭐.. 요정이 했다거나? 뭐 그런 설명들을 했겠죠. 바로 이거에요, 설명. 힌두 신화였나? 아무튼 거기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거대한 거북 위에 있다고. 누가 묻죠, 그럼 그 밑에는? 그래서 대답해요, 그 밑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고. 하지만 그 밑에의 밑에의 밑에는? 모르죠. 그 때 무한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무한히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우리에게는 세계이지만) 거북 한 마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말이죠. , 이 때 무한대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창세기, 혹은 태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베레시트와 정확히 동일한 이치죠. 사실, 아직도 창조론이 창조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논리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 존재했던 자들인가? 그럼, 이 모든 물질들의 태초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아 여기서 원래 '이집트 왕자' 장면 가져와야하는데.. 뭐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 장면입니다. 모세는 불꽃을 향해 물었죠, 당신은 누구냐고. 기독교의 신은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됐다는 것이죠.

빅뱅이론을 설명해볼게요.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물리학 지식이 필요합니다만.. 그냥 들으세요 뭐. 우주는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도플러 이론 정도는 아시죠? 그 기차 같은 거 지나갈 때 슈웅 하고 소리의 주파수가 바뀌는 거. 원리는 단순해요. 관측자에게로 다가오면서 생겨나는 음파는 주파수대가 점점 높아지고, 멀어질수록 주파수대는 낮아집니다. 여기서 주파수란, 파장의 진동수를 말하는 것쯤은 다 아시죠? 이러한 주파수의 변동 현상이, 우주에 있는 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일단 먼저, 빛은 파장의 성질을 가진 물질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어쨌든, 대략 50년 전쯤에 관측한 별빛의 주파수와 현재 관측하는 별빛의 주파수가 다른 것이 계속 관찰되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이렇게 우주가 계속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볼게요. 지금은 확장하는 우주니까, 축소하는 우주로 바꿔서요.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그니까 우주가 전혀 확장하기 이전, 우주의 모든 물질들이 하나의 이라 말할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 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태초에는, 우주 전체라는 엄청난 질량(혹은 에너지) 가 그런 작은 공간 안에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질량들의 균형이 무너지는사건이 일어나요. 그 때, 물질과 반물질이 떨어져 나가요. 그렇게 균형이 깨지며 동시에 대폭발, 즉 빅뱅이 일어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의 방법으로 등장한 이론들에는, 유신진화론, 지적설계론, 젊은 지구 창조론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의 대부분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죠.

먼저 유신진화론이란 최초의 빅뱅 자체에 신의 의지가 개입하였고, 그 후의 진화의 모든 형태가 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쪽에서 공식적으로인정하고 있으며, 그나마 가장 무난한 창조과학의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에 의해서도 될 수 있겠죠?

다음으로 지적설계론 이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정교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설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최신의 창조과학 쪽에서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구의 역사는 대략 5,000 년 정도인데 반해, 지질학 쪽에서 이야기하는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입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말이죠.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창조과학이란, 그저 졸렬한 타협의 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먼저 생각해봅시다, 과학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보편적인 증명이 가능한 이론들의 총합입니다. 그리고 창조론은,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하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는 가능할까요? 이에 대한 제 대답은, 공존은 가능하되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개신교에는 가톨릭과는 다른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주장했던 다섯 솔라 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라는 말인데요, 이 말인즉슨 모든 것은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신의 존재는 물론, 그분이 하신 모든 일까지 말이죠. 창조에 대한 것은 당연히 포함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론은 '믿는' 것이며, 창조과학은' 알고자 하는 시도' 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신앙에서는 'sola gratia' 라 말합니다. , 은혜가 없이는 알 수조차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심지어, 창조과학은 과학적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인지부조화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패러다임이요? 그들에게 창조과학이란, 신앙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평행선입니다. 절대 만날 리 없는 것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충돌할 이유도, 서로에 간섭할 권리도 없습니다. 창조론은 지식이 아니며, 진화론은 신앙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이런 젓가락과도 같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서로 충돌하면서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죠.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혹은 디도서 3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심지어 바로 다음 디도서 32절에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라는 말로써 '건전한 비판'마저 '비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신앙과의 연관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sola gratia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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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1. “빈곤의 세계화가 이루어지는 직접적인 이유에 대해 구체적으로 예를 들어 설명하시오.

 

렌탈회사(혹은 리스)의 경우를 볼게요. 이들은 거대한 자본력을 바탕으로, 미리 상품을 구매해서, 일정한 대여료를 받고 상품을 빌려줘요. 제레미 리프킨의 소유의 종말에서는, 이런 렌탈회사들을 분석할 때는 기존 상품의 판매방식 관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주장하죠. 새로이 등장하는 이런 판매자들은, 상품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들은 경험을 판매합니다.

이제 자본, 좀 쉬운 용어로 바꾸자면, 상품(아예 의미가 달라질지도 모르지만, 논의는 그대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의 회전력은 굉장히 높아지고 있어요. 컴퓨터의 경우를 볼까요? 무어의 법칙이란 것이 있어요. CPU의 처리속도가 18개월마다 2배씩 높아진다는 것이죠. 조금 더 격하게 바꿔볼까요? 3년마다 4배씩, 9년이면 64배의 발전을 합니다. 자본의 순환주기보다 기술의 발달이 더 빨라진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소규모 자본가들은 기존의 생산시설이 낙후되는 것을 피할 수 없게 됩니다. 결국 리스라는 상황을 통해서 거대 자본에게 종속되는 현상을 보이죠. 물론 여기서 종속이라는 말은 신중하게 사용해야 하겠지만, 거대 자본 중 어떤 거대 자본과 연결되느냐의 차이일 뿐이지, 결국 프롤레타리아화라는 현상은 명백히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최근 등장하기 시작한 클라우드 컴퓨팅이 이를 보여주는 예가 될 수 있습니다. 어차피 개인은 컴퓨터의 발전 속도를 따라갈 수 없다고 말했죠? 그래서, 개인은 그러한 발전을 따라가지 않아도 되도록 하는 것이 클라우드 컴퓨팅입니다. 클라우드란, 컴퓨터의 작업을 특정 서버 컴퓨터에 연결해서 수행하며, 개인의 컴퓨터는 단순한 수신기(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모니터)역할만 수행합니다.

대표적인 클라우드 컴퓨팅의 예로는 애플의 icloud(혹은 아이튠즈), 구글의 대부분의 서비스들, dropbox, Wolfram Alpha 등이 있습니다. 현재까지는 이러한 클라우드 서비스가 반 무료로 이루어지고 있지만, 이에 대한 특정한 요금체계가 하나둘 생겨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각각의 부품회사, 혹은 소프트웨어 회사에서 가질 수 있었던 수익들이, 특정 대기업에게로 몰려가고 있는 것이죠.

그런데 살펴볼 것이, 이는 모두 서비스업입니다. 클라우드의 생산자든 소비자이든, 결국 서비스를 사고파는 것이죠. 혹은 이에 부가되는 첨단 산업도 고부가가치 산업이긴 하지만 결국 부의 집중현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O-Ring Theory 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어느 순간 이러한 발전 속도를 놓치게 된다면, 기존에 서비스의 생산자의 위치에서 클라우드의 소비자로전락하게 된다는 뜻이죠.

소프트웨어 산업을 예로 들어도, 모든 프로그래머가 MS에 있는 사람들처럼 부자가 아닌 것처럼 말이죠. IOS나 안드로이드 같은, 좀 더 가까운 곳에서라면, WindowsOSX같은, ‘위대한수준의 OS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있는 한편, 지구 반대편(대표적으로, 한국)에는 그저 코딩하는 노예일 뿐인프로그래머들이 발에 차이도록 많은 상황입니다.

세계화는 국가 간의 경계선을 흐려 놓았고, 낮아진 국경의 담을 넘어 거대자본(혹은 국가)들은 중소규모 자본(혹은 국가)들의 영역을 침식하고, 또 흡수하게 됩니다. 이런 과정에서 부의 편중 현상이 일어납니다. 사실, 말이 좋아 편중이지, 반대로 말하면 빈곤의 세계화, 혹은 빈곤의 보편화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소비자본주의의 강화추세는, 개별 경제주체의 유동성을 극단적으로 강화시키려 노력합니다. 지그문트 바우만의 논의에서처럼, 액체 근대가 이루어지는 것이죠.

사회의 변화 속도는 점점 빨라지지만, 쁘띠 부르주아지, 혹은 쉬운 말로 자영업자들은 그러한 변화의 속도를 따라갈 수 없죠. 이는 가까운 슈퍼마켓만 보아도 알 수 있죠. 구멍가게가 살아남는 시대는 지났습니다. 이미 대기업들이 이런 틈새시장의 영역을 침범하여, 종속시키려 노력합니다. 그리고 중소규모의 자본은, 그러한 흡수를 버틸 능력이 없습니다.

오픈마켓의 경우, 한국의 지마켓과 옥션은 이미 이베이(eBay)의 자회사나 마찬가지입니다. 개개인이 쇼핑몰을 열어 성공할 수 있다던 과거의 성공신화들은, 말 그대로 신화의 수준으로만 남게 되죠. 개인들은 그저 이러한 거대 쇼핑몰의 고객이 되는 상황입니다.

클라우드 자체에 대한 소유권, 혹은 생산수단은 거대 자본가에게로 집중됩니다. 렌탈(리스)회사들은 경험을 판매합니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자본을 빌려주어서, 그것에 대한 사용료를 지불하도록 하죠. 사용한다는 경험 자체를 판매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구조 자체는 매우 안정적인 형태로 고정됩니다.

한국의 기술체계, 특히 휴대폰 기술의 경우는 이미 갈라파고스로 변해 버렸던 경험이 있습니다. 내부적으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인하여, 외부에 대한 적응력이 극도로 낮아진 상황이죠. 이는 내수시장이 자체의 생산력을 통제범위 안에 둘 수 있는 상황에서는 상관없었지만, 클라우드가 도입될 정도로 통신 기술이 발달된 현재의 상황에서는, 가장 빠르게 흡수당했습니다.

맨 처음 한국에 아이폰이 등장할 시기에는 윈도우 모바일(이하 WM)등을 사용하여 기존의 피쳐폰 체계를 유지하려 했지만, 어느 순간 버틸 수 없게 되자 결국 안드로이드 & IOS”의 시장 양분 체계를 만들어버렸죠.

클라우드 컴퓨팅의 시장 또한 동일합니다. GMail 등이 대용량메일과 메일 처리 시스템의 클라우드화를 이룩하자마자, 한국에서도 자체 서버를 사용하여 대용량메일을 시도해야 하는상황이 만들어집니다. 반응하지 않으면 결국 도태될 뿐이니까요.

한국의 경우는 더 시급한 것이, 매우 뛰어난 인터넷망을 활용하려는 개인의 적극적 의지에 의해 촉발됩니다. 비정규직법과 FTA가 상승 작용을 일으켜서, 외국 노동력의 수입이 훨씬 쉬워지는 상황과도 쉽게 연관 지어 생각할 수 있겠네요.

결국 기업은 스스로 발전할만한 동력이 부족해집니다. 공룡기업들이 보편적으로 등장함에 따라, 결국 중소규모의 기업들은 흡수당하거나, 혹은 도태당해야 하는 양 갈래 기로에 설 수 밖에 없습니다. 마르크스의 말마따나, 이러한 현상에 반하는 사례는 충분히 존재할 수 있겠지만(한국에서의 V3, 카카오톡 등이나, 외국의 중소규모 게임회사에서 만든 대작들) 일반적인 분석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지니지 못합니다. 결국 20:80의 사회 논의는, 그나마 예외가 될 것이라고 여겨졌던, 혹은 벤처기업의 마지막 희망이라고 여겨졌던, 소프트웨어 산업에서도 이렇게 노골적인형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신자유주의적 경제정책에 의해 이데올로기적으로 정당화가 이루어집니다. 현재의 사회적 혼란에 대해, 한국의 경우는 빨갱이라는 이데올로기적 용어를 사용하여, 책임을 전가시키죠. 이러한 특정한 자체는 모든 문화 체계 안에 존재합니다. 어떤 사회에서는 복지일 수 있고요, 어떤 곳에서는 복지를 주장하는 사람들일 수 있겠죠.

물론 현재 이루어지고 있는 소비적 복지에 대한 비판은 충분한 정당성이 존재합니다. 복지로 인해, 그것의 수요자들은 상황의 변화에 대한 일종의 방어력이 사라지고 있으니까요. 스펜서의 유기체적 사회 논의에서 볼 수 있다시피, 사회 내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분업에 의해, 자신들의 역할 이상을 수행하지 못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번 실업을 겪는다면, 혹은 한번 생산수단을 흡수당한다면(빼앗긴다면), 다른 직종으로 쉽게 옮겨갈 수 없는 상황이 되죠.

그렇기 때문에, 그나마 대안으로 등장하는 것이 생산적 복지입니다. 노동시장에서 가치가 없어진, 혹은 시스템 상에서 빈곤을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을 재활용하기 위한 것이 그러한 생산적 복지, 즉 교육입니다. 교육은 오히려 신자유주의적 배경에서 등장했다고도 할 수 있죠.

출발점이 동일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준 이후에경쟁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물론 출발점은 동일하지만, 절대로 길 자체가 동일할 순 없습니다. 누군가는 내리막길을 달릴 테고, 누군가는 진흙길을 달리고 있겠죠. 진흙길을 달리는 사람은 결국 그 진흙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멈춰버리거나, 혹은 빠져나오기 위해 뒤로 걸어야 합니다. 혹은 다른 사람들이 뛰어가는 데 방해된다는 핑계로,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물병조차도 빼앗겨야 하겠죠. 그리고 그것은 잘 뛰는 사람을 잘 뛰게 두어야한다!”라는 논리에 의해 정당화됩니다.

 

2. 한국사회에서 사회적 자본을 확충하기 위해 실질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신뢰제고방안을 구체적으로 제시하시오.

 

여기서도 예를 들어 설명해볼게요. 08학번에게 있어서 입시제도란, 말 그대로 저주받은형태였습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가리켜 저주받은 89”라고 칭하기도 하죠. 그래서 08~10까지의 89년생끼리는, 서로에 대한 일종의 경외감이 존재합니다.

지옥 같은 입시형태를 거쳐서, 결국 대학이라는 곳에 왔다는, 그래서 거기서 만났다는, 일종의 동료의식이 존재하는 것이죠. 이것은 비단 저희 세대만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이전에 94학번들이 그랬고, 더 이전에는 학생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그랬죠.

이러한 특정 세대들의 공통점은, 결국 각각에게 일종의 연대감이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청소년기에 겪었던 특정 사건, 혹은 조건들은, 개개인의 의식 속에 매우 깊은 수준까지 박혀 있게 됩니다.

이는 자신들의 이익집단적 세대개념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 단순한 언어적 공동체(혹은 상상의 공동체)’수준에서 끝날 수도 있죠. 중요한 것이라면, 이러한 시간으로서청년기의 구성주의적 계기로 인해, 실제로 이런 세대적 공동체의식이 형성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옆에 있는 학우들을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학교가 아닌 다른 곳에서 만났을지라도,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은, 서로가 학교라는 이름으로 공유하는 측면이 존재하기 때문이죠. 같은 학교가 아니더라도, 같은 지역, 심지어는 같은 국가(외국에 나가 있을 때라면)에도 해당합니다.

이러한 공동체의식은 결국, 서로에 대해 공유하는 부분이 있다는 것, 즉 서로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가정해야 합니다. 서로가 서로를 알 수 없다면, 결국 사회의 연결망 자체가 형성될 수 없습니다. 상대방을 알 수 없다면, 상대방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보장할 수 없게 되며, 결국 상대방을 믿을 수 없게 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사회적 자본(혹은 신뢰)은 서로가 서로에 대해 알고 있다는 것에서 출발합니다. 위에서 말했던 저주받은 89’ 역시, 스스로가 겪어본 입시제도이며 동시에 상대방도 그것을 겪었으리라는 기대의 연장선상에서, 그러한 경험공유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예측가능성, 혹은 지식은 권력으로 작용합니다. 상대방을 알고 있기 때문에 예측할 수 있고, 그렇기 때문에 일종의 힘으로서 작동하죠. 하지만, 공유라는 말을 일치라는 말로 살짝 바꿔준다면, 지식 자체는 권력뿐만 아니라 연대감 형성에도 작용할 수 있게 됩니다. 지식이 권력으로만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에 대한 지식의 공유로 인해 상호 영향력으로 작용하여, 연대감 형성에 기여하는 것이죠.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력을 미친다, 그것이 바로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기반입니다.

물론 이런 단순한 세대개념이 사회적 자본으로 발달하려면 아직 많은 난관이 존재합니다. 경험의 공유로 형성되는 공동체는, 경험을 공유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필연적으로 배타적인 형태로 작용합니다. 결국 이는 사회적 자본의 편중현상으로 인해 갈등이 구조화되어, 결국 더 큰 갈등을 부를 수도 있게 됩니다.

하지만 이러한 기반 자체는, 사회적 자본이 형성되는 데에 많은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결국 더 넓은(혹은 더 많은 사람을 포괄하는) 사회적 자본을 형성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보편적인 집단적 경험이 필요하다는 뜻이죠.

과거에 2002 월드컵 때의 경우를 보아도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한 축제적 분위기에서의 사람들은, 의례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순간만큼은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공동체로 통합되는 것이죠. 문제라면, 그것이 지속되지 않았다는 것에 있습니다. 특정한 상징물(예를 들자면 광장에 축구선수나 축구공 동상을 세운다든지)이 존재하지 않는 의례는, 공동체로 발전할 수 있는 여지를 부여하지 못합니다.

종교단체, 특히 교회의 경우를 보겠습니다. 최근 교회에 대한 많은 공격은, 그들의 기부금(헌금으로 칭하겠습니다)을 어디에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잘 드러나지 않음에 기인합니다. 물론 이는 기독교 성경에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라는 말을 너무 충실하게 지킨 나머지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 모르게 했기 때문에, 결국 교회라는 단체 자체를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이릅니다.

자신의 헌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지 모른다는 것은, 예측가능성의 저하와 일맥상통하죠. “내가 너 꿍꿍이속을 모르는데 널 어떻게 믿어?”라는 질문이 이런 상황에 잘 맞는 질문이 되겠습니다. 물론, 이러한 측면은 교회 내에서의 수많은 의례를 통해, 종교 자체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키는 측면으로 무마시킵니다. 그리고 그런 시스템은 최소한 교회 내부에서는 잘 작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바깥으로, 미디어에서 드러날 때는 상황이 전혀 달라집니다. 미디어는 미디어 나름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고, 미디어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이러한 폐쇄성(혹은 불투명한 예산 집행)을 비리와 연관시키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즉 종교단체들의 이미지적 정당성을 지워버리고 있는 것이죠.

이와 똑같은 이치를 국가로도 확장시킬 수 있습니다. 법치국가라는 곳에서 법 집행이 잘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인식이 만연해있고, 공무원들은 자신의 업무에 태만하다는 내용의 담론이 이미 구성돼있으며, 아이들은 때려야 말을 듣는다는 믿음이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왔죠. 이런 상황에서는 서로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위해 강제적인 수단을 사용해야 하고, 그것은 곧 비용으로 작용합니다.

여기서 서로에 대한 신뢰를 증진시키기 위해, 하버마스의 공론장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그럭저럭 유용한 대안이 될 수 있습니다. 서로가 대화를 통해서 서로에 대해 알 수 있고(지식), 서로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담보할 수 있게 되는 것이죠. 단순한 지식의 전달을 통한 권력적 의사소통(혹은 의사-의사소통, pseudo-communication)이상의, 상호 영향력을 지니는 대화는, 사회적 연대감을 증진시키는 작용을 합니다.

하지만, 이런 공론장의 개념은 매우 이상적인수준에서나 말해질 수 있습니다. 현실에서는 이런 공론장이 형성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애초에 자신과 맞지 않는 사람과는 대화 자체를 나누지 않는 한국 사회에서, 공론장의 형성은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SNS가 대안으로 등장하긴 했지만, 그것들도 결국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만 듣게 됩니다. 국민신문고 등이 정부에 대한 의견 제출의 문으로 작동하기는 하지만, 이 또한 요청-수용/거부의 단선적인 측면일 뿐이지, 담론이 존재하지는 않습니다.

자본주의(혹은 국가라는 체계 자체)는 너무나 거대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은 자본주의 전체에 대한 예측을 내어놓을 수 없습니다. 결국 자본주의에 대한 신뢰가 떨어지게 되죠. 국가의 경우도, 종교단체도, 사회 조직체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런 거대한것들에 대한 신뢰 확립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개개인 수준에서 연대감 형성을 통한 신뢰를 확립해야 합니다. 청년기 시절부터 어떤 특정한 연대감을 지닐 만한 단체, 혹은 의례에 참여하도록 환경을 조성하고, 그것이 실제로 중요한 것처럼 여겨지도록 하는 담론을 형성합니다.

정부의 신뢰도라면, 공기업의 임금 체계 개선이나, 경제 관련 비리에 대한 처벌 강화가 답이 될 수 있겠죠. 즉 법적 체계가 강화되어야 합니다. 싱가포르의 육체적 처벌과 같은 비인간적인 법도 답이 될 수 있습니다. 일벌백계적 측면은 필요하니까요.

속된말로, “정부는 까야 이라고들 합니다. 그렇다면, 정부를 까는사람들에게 깔 거리를 주는 것도 답이 될 수 있죠. 비리 등에 대한 완전한 공개와 처벌을 통해, 정부 자체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증가시켜야 합니다. 아예 이성적 측면을 강화시켜서 쇠울 속에 넣는 것입니다.

 

3. 한국사회에서 개발독재(development dictatorship)의 긍정적인 결과와 부정적인 결과를 비교하여 논하시오.

 

먼저, 다른 이러저러한 것 말하기 이전에, 경제가 발전했습니다. 사실 정확히 말하자면 발전이 아닌 성장이라고 해야 맞겠지만요. 어쨌든 이런 수치상의 성장 자체는 한국 사회에 많은 긍정적 영향을 미친 것이 사실입니다. 경제 성장으로 인해서 국가적 신뢰도도 함께 올라갔죠. 이는 국가경쟁력의 강화에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에 따라, 국제관계에서도 수많은 이점이 존재합니다. 예를 들어 살펴보자면, 최근 의궤 반환의 경우가 있어요. 과거에는 의궤 반환에 대한 주장의 방식이 단순히 윤리적인 요청에 불과했던 반면, 지금에 와서는 일종의 경제적 부담감의 방식으로 압력을 선사할 수 있게 된 것이죠.

또한, 독재의 과정에서 만들어졌던 지배 시스템 역시, 현재에도 어느 정도 작동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과거 베이비붐 세대의 경우, 독재 정권의 경찰국가적인 검열시스템의 위력을 온몸으로 체험한 경험이 있습니다. 그에 따라, 지금에 와서도 어느 정도는 자기 검열을 수행하곤 하죠.

물론 이것이 개인에게는 긍정적인 일로 작용하지 않을지라도, 사회 전체로 보았을 때는 어느 정도 안정에 기여하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현재까지 이어 오는 보수정당의 집권 자체는, 정치적 안정성을 보여주고 있죠. 이러한 정치적 안정성은, 한국 사회의 경제력 발전에 큰 도움을 미쳐왔고, 또한 일종의 예측가능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수행하게 됩니다.

현재는 이런 보수정당들에 대한 지속적인 비판이 존재하지만, 아쉽게도 일부분일 뿐입니다. 아직 대부분의 사람들, 최소한 한국 인구의(혹은 정치 참여자, 즉 투표자 비율의) 절반 이상의 사람들은, 현재의 시스템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것이 계급배반이든, ‘국개론이든, 심지어 그것이 “XX면 어때 경제만 살리면 그만이지식의 자포자기식 신음일지라도, 결국 그에 대한 지지도 자체는 그리 떨어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식의 경제관념은, 신자유주의와 함께 묘한 이중주를 만들며, 점점 더 견고한 형태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이는 놀랍도록 안정적인 형태죠. 개발 독재 상황에서의 풍요, 하지만 그에 따르는 노력하면 성공하는 개인이라는 관념 자체는, 현재 영웅적 세대들의 꾸중의 이중주가 되기도 하지만, 동시에 일종의 좋았던 옛 시을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결론적으로 보았을 때, 경제가 성장했고, 높은 안정성을 현재까지 유지시켰으며,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이는 것에 훌륭한 기반이 되어 준 것이 개발 독재입니다. 이는 애초에 성장의 역량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전후 한국 사회에 윤활유를 부어넣는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그로 인하여 IMF 이전까지는 성장을 지속할 수 있었던 배경이 됩니다.

하지만 문제는 거기서 출발합니다. 경제의 성장이 IMF 이전까지였다는 말은, 개발독재의 경제 성장 방식으로 성장할 수 있는 한계가 거기까지였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IMF 이후부터는 그러한 정부 중심의 발전’, 혹은 수정자본주의적(혹은 케인즈주의) 발전양식 자체는 그리 큰 성과를 보여주지 못하게 됩니다.

또한, 원료의 수입과 상품의 생산, 즉 수출지향 산업화로 인해, 국제정세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다는 문제점이 있습니다. 한국의 경우 수입대체 기간이 매우 짧은 편이었고, 또한 내수시장 자체가 매우 작기 때문에,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수출에 더 무게감을 두어야 하는 문제가 존재하죠. 하지만, 그런 만큼 오히려 더 인적자원에 투자하는 식으로 발전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이런 방식으로 성장했던 나라는, 사실 대부분의 "late development" 국가들이 이에 속합니다. 물론 이들의 성장 방식을 그대로 가져올 수는 없겠지만, 이들을 벤치마킹 하는 것 자체는 가능합니다. 극단적인 사례일수도 있겠지만, 싱가포르가 그 예가 될 수 있겠죠. 물론, 극단적인 사례일 뿐입니다.

결국, 경제의 성장측면에만 집중한 덕분에, 경제의 발전자체에는 그리 큰 투자를 하지 못한 측면이 존재합니다. 자유주의에서 이어오는 신자유주의(혹은 고전적 자유주의의 부활로 여겨지는)로 인한 과도한 경쟁과 그에 대한 합리화(혹은 정당화)로 인해, 오히려 지속적인 경제성장의 역량은 감소하고 있습니다.

경제성장의 역량이 감소하고 있는 대표적인 예시로, 빈부격차의 확대를 들 수 있습니다. 위에서 말했던 것처럼, 발전 없는 성장의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부의 집중입니다. 부의 집중은 곧 빈곤의 보편화로 치환될 수 있고 말이죠. 이로 인해서, 현재는 경제가 효율적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안정적인 구조자체가 유지된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더 이상 발전(심지어 성장조차도)하지 않고 유지되는 구조로 인하여, 결국 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도가 축소됩니다. 이는 사회적 자본의 감소로 연결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는 경제적 비효율성을 부를 수밖에 없죠.

또한, 사회가 성장하는 상황에서는 상관이 없겠지만, 현재와 같은 고착적인상황에 이른다면, 유동적인 상황에 대한 유기체적 대처가 불가능하게 됩니다. 스펜서의 논의에서처럼, 사회의 분업화가 진행될수록, 환경에 대한 개인의 적응력은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만큼, 구조에 약간이라도 변화가 일어난다면 개인의 입장에서는 삶 자체가 무너지는 것과 동일한 상황을 겪게 되죠.

이러한 혼돈의 상황은, 결국 과거에 대한 향수를 부르게 됩니다. 이는 결국 과거로 돌아가려는 움직임을 만들어내고, 결국 사회적 갈등 요소로 작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새로이 등장하는 세대들은 과거 기득권층이 만들어놓은 불합리한 제도들을 개선해야지 자신들의 이익을 담보할 수 있습니다. 중화학공업과 정부투자 일변도의 경제정책은, 현재 한국 사회, 심지어 세계정세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으니까요.

이는 88만원 세대에서 선언하는 것과 동일한 의미의 연장입니다. 개발독재가 만들어냈던 안정성, 그 안정성의 가치를 거부하는 세대들에 의해서, 새로운 갈등의 요소로 변화합니다. 수치상의 성장 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은, 교육받은 사람들, 최소한 자신들의 상황을 인지할 수 있는 사람들을, 시스템 자체의 적으로 만들어버리죠.

결국 과거 개발독재 상황에서는, 정부, 정부에 충성하는 기업, 노동자들 정도만으로 구성된 사회를 지향합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발전의 기회를 걷어차는형국이 됩니다. 엘리트에 대한 포섭이 점점 힘들어지고, 교육받지 못한(혹은 자신의 사회경제적 위치를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한 계급배반만이 일어나며, 종국에는 그들을 모두 만족시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사회적 신뢰도가 하락하게 됩니다.

이는 사회적 합의 구조의 부재에서 원인을 볼 수 있습니다. 과거 군사독재의 잔재에서 출발한 신분제적인 사회 관념으로 인해,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사회적 공론장의 출현 자체가 불가능하게 됐죠. 그로 인해, 같은 계급(경제적 의미론만으로 따지자면) 내부에서조차 분열이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각자가 경쟁 시스템 안에서 잘 살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밀어내야 하는 상황인데, 타인에 대한 무지로 인하여 그것이 정당화되는 것이죠.

사람은 주체에 포함되지 않는 타자에 대해서는, 충분함 이상으로 잔인하게 될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합니다. 더 잘 살기 위해서, 혹은 주체 자체의 생존을 위해서라도, 타자는 제거되어야(혹은 나에게 그대의 것을 주어야) 하는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자유주의적 경쟁체계로 인해 정당화됩니다.

이런 상황을 설명하기 위해서, 사례를 가져와서 말하는 것이 더 나을 수도 있겠습니다.

한 가난한 체대 학생 A가 있습니다. 등록금을 마련하기 위해 용역으로 일하며, 철거 현장이나 시위진압 등에 동원되기까지 하죠. 하지만 그나마 잘 살아 보기 위해 믿음을 가지고 삽니다. 화려한 교회 건물을 짓기 위해 마련된 교회 건설현장에서 노가다로 일하고, 그 돈은 다시 헌금으로 바칩니다. 열심히 일하고 그 돈을 헌금하면, 결국 축복받아서 잘 살게 된다는 믿음이죠. 뭐 바치고 나면 주님이 다 채워 주시겠지.”라는 말로 그냥 넘겨버립니다. 지금 힘들게 살고 있는 것은, “다 그놈의 사탄의 자식들, 공산주의자 놈들이 문제야!”라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할 수 있습니다. 물론 그 공산주의자들은, 시위하는 사람들이나, ‘장로 대통령님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의미하겠죠.

이는, 자신의 범주에서 벗어난 이들을, 모두 하나의 타자로 뭉뚱그려 설명할 수 있는 종교의 역할에서 출발합니다. 하지만, 일반적인 비 기독교인들은 그에 대한 확신이 있을 리 없겠죠. 오히려 그런 인식 자체를 순진한생각으로 인식하여, 기독교인(혹은 보수적 정치 정체성을 가진 사람들)들을 타자로 인식하게 됩니다. 결국 종교 또한 하나의 사회적 갈등 요소로 작용하게 되죠.

종교가 사회적 공론장이 아닌, 정치집단의 연장선상이 되는 것 또한, 개발독재시기에 살아남았던 보수적 기독교 종파들의 영향력이, 종교계에서 가장 강한(최소한 경제적 측면에서는, 규모 또한 가장 큰 편) 상황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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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잉여가 뭐라고 생각해요? 다들 잉여라고 그러면 뭔가 부정적인 생각부터 가지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그렇게 보거든요. 잉여라는 말은 나머지라는 말과 동의어에요. 혹은 잉여라는 말을 순화하면 나머지라는 말이 되죠.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나머지 공부, 수치스러운 일이잖아요? 잉여 학점, 남들 다 가져가고 남은 학점을 내가 챙긴다, 부끄럽잖아요?

오래 전에 저희 집 책장에는 잉여인간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어두운 책 표지에, ‘남겨진인간에 대한 내용일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펴보지 못했던 책이죠. 사회에서 잉여가 된다... 그것은 분명히,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어요. 생각해봐요, 누가 여러분을 잉여라고 부른다면 기분 좋겠어요? 두려움의 대상인 잉여인데, 그 화살이 나에게로 향한다면, 그것은 분명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두려움도 반복되면 불쾌감이 되는 법이니까요.

서강대 사회학과에는 잉여라는 이름의 학회가 있어요. 학회의 목적은, 잉여라는 언어에 드러난 현대 사회의 문화 코드, 그리고 사회문화적 의미론의 분석이에요. 특히 요즘 그 학회에서는 잉여니스의 현상학이라는 주제로, 잉여라는 의미가 생산되고(혹은 외재화externalize) 다시 인식(혹은 내재화internalize)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잉여라는 말 자체가, 현대 사회의 많은 모습들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신뢰와 함께, 잉여라는 언어 자체의 의미가 재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죠.

이렇듯, 잉여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 코드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혹은 이러한 문화가 주로 확산되는 곳인 인터넷 공간의 문화 코드라고도 할 수 있죠. 인터넷 공간의 주된 향유자를 청년층으로 좁힌다면, 잉여는 청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거칠게나마표현할 수 있겠죠.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비웃어버리죠. 서로의 의미 없는(그것이 고의적으로 의미 없을지라도, 심지어 그것이 의미 있는 행동일지라도) 행동에 대하여 잉여짓이라고 칭하며 스스로들의 행동에 대해 쓴웃음을 짓는 거예요.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잉여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서로에게 잉여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거리끼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잉여라 칭하는 것을 기분나빠하면서 동시에, “그래 나는 잉여니까라는 자학적인 말을 덧붙여 버리죠. 청년 세대 자체가 스스로를 잉여라고 낙인찍어버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근데 왜 기분이 나쁠까요? 왜 잉여라는 말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할까요? 그건, 잉여란 말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 일거에요. 그렇다면, 이런 잉여란 무엇이며, 이들이 한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일까요? 먼저 잉여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 알아볼게요.

 

 

잉여(剩餘)[ː-]

명사

1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로 순화. 여잉(餘剩).

2」『수학나머지4의 전 용어.

 

 

일단 사전적 정의를 가져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의미를 구체화시키기 보다는 더 멀게만 느껴지게 만들었네요. 그래서 여기에 좀 더 설명을 덧붙여볼게요. 2번의 정의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1번만 설명해 보자면, 가장 먼저 남은 것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와요. , 이미 잉여가 아닌 것들을 통해 일처리를 다 했으니, 잉여는 일처리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죠. , 쓸모없는 존재가 되죠. 잉여가 아닌 것들은 이미 어떠한 위치가 부여됨으로서 사회 내에서, 특정한 쓸모를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잉여는 어떠한 위치가 부여되지 않아요. 사회, 조금 작게 표현해서 일처리를 수행하는 데에 어떠한 가치도 지닐 수 없는 것이 잉여라는 뜻이죠.

이렇듯, 사회는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서 잉여를 만들어내죠.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다고 생각해봐요. 끌과 정을 통해서, 대리석은 특정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나가죠. 그렇게 하나의 조각이 완성됩니다. 어떤 완결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조각이 말이죠.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완성된조각이 있기 위해서는 깎아 낸 나머지 조각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나머지 조각은 재활용이 불가능해요. , 나머지는 쓰레기가 됩니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호황기일 때도 결국 실업자는 존재합니다. 이는 완전고용 실업률, 혹은 자연실업률이라고 하죠. 경제활동인구의 3%정도만이 실업인 상태를 보통 완전고용상태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경제가 호황이 되어도, 이들은 결국 실업상태를 유지할 수밖에는 없어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기술이 발달하는 상황에서 더 심해집니다. 최근(이라기엔 꽤 지났지만) 등장하기 시작한 ‘20:80의 사회복지라는 논의들에서 잘 볼 수 있죠. 20%만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데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그들을 보조하는역할만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매우 안정적인형태로 스스로를 유지합니다. 여기서 80%는 잉여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인력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 속으로 편입되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백수의 상태로 내버려두며, ‘잉여라는 말로서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잉여가 됩니다. 청년기의 상태, 특히 대학생이라는 기간은, 사회로 나가기 직전에 거치는 일종의 모라토리움상태에요. 청소년기의 연장으로서 존재하는 이러한 유예기간은, 이미 독립했어야 하는 나이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여전히 학생으로 규정하여, 20에도 80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이들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서 복지의 대상이 되며, 사회에서 쓸모를 가지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적 시간에 속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구조주의의 논의를 직접 가져와볼게요. 사실 지금까지 했던 분석의 형태는 대부분 구조주의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형태가 필요하니까요. 구조주의란 세상을 이분법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개인의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일종의 내재적인(혹은 선천적인)’ 의지가 있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만들죠. 또한 만들어야 하고요. 그리고 여기에 실존주의 논의를 살짝 더한다면,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세상을 내 편너희 편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죠. , 모든 것을 주체와 타자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들은, 위험한 것이 되어 피해야 할 것으로 분류됩니다. 기독교의 성경, 특히 레위기 부분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나누는 부분에서 이러한 것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기존의 세계관으로 분류가 가능한 것, 즉 명백한 것은 먹을 수 있는 동물이지만,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존재는 부정하며 먹을 수 없는 존재이고, 또한 피해야 할 존재가 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대부분의 전통에서 무서운 대상(혹은 경외의 대상)들은 보통 이런 중간자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로, 귀신을 볼까요? 이들은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들이에요. 미노타우르스는 인간과 소의 하이브리드고 말이죠. 이러한 중간자적 존재들은 배척당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세계관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니까요.

이러한 분석법으로, 대부분의 신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조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 되는데요, 구조주의는 Theory of Everything 이기 때문에 동시에 Theory of Nothing 도 될 수 있죠. 하지만 일단 분석의 도구로서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자주 쓰이며, 그만큼 많이 비판받게 되죠. 이러한 구조주의적 분석은 신화에 대한 분석을 뛰어넘어, 최근 영화에 대한 분석의 도구로써도 많이 사용됩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어. 당연히 주체는 인간이었지. 그런데 정작 관심과 시선은 타자를 향하고 있어.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억압받는 타자가 주인공인 거지.

아 먼저, 주체란 나 혹은 우리를 뜻하고, 타자는 , 너희, , 그들등을 의미해.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거야.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겠지.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그 본능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들어.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지.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이 위에 설명한 격리.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에는 격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 이로써,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되지.

영화는 여기서 다시 만약?’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바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자야. 이건 뭐 거의 에반게리온에서 롱귀누스의 창같은 존재야.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존재. 그런데 그는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해. 이카로스의 욕심에 묻혀버리지. 여기서 모큐멘터리의 아이러니는 빛을 발하지.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악한인간으로서의 주체와, 정말 인간적이고 선한 외계인들. 이것을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빌려 매우 강한 설득력으로 뇌리에 심어놓지. 영화는, 타자의 외침을 끊임없이 전달해. “살려줘!”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해.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주체들도 외치고 있어, “살려줘!” 라고. , 네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쩔 거야? 일단 살기 위해 쏘겠지. 그들도 똑같아. 살기 위해 타자를 억압하고, 죽이고, 실험하지. 그것이 좀 더라는 말이 생략될 수 없기에 천인공노할 짓거리가 되겠지만. 뭐 그럼 어때,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닌걸. 타자는 단지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야. 스타에서 미네랄 캐면서 죄의식 느껴본 적 있어?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껴? 만약 네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 거야. 그것이 바로 주체야.

그런데 그렇게 든든한주체와 객체의 벽을 허무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었던 거지. 하이브리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이브리드. 너무나 바보 같고 착하고 정말 인간적인 욕심밖에 지니지 않았던 하이브리드.

 

 

다시 경제논리로 돌아와서, 20의 위치이든 80의 위치이든 결국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청년기의 사람들, 혹은 백수들은, 그 어떤 위치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타의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라는 일종의 의례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하고 월급을 받는 것, 그러한 삶의 반복은 의례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모두 일하고 있다는 그런 일종의 동시성에 대한 믿음은, 일하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집합적인 주체의식을 만들어내죠. 그리고 2080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잉여가 되어, 일종의 위협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위협이라는 용어가 뭔가 탐탁지 않다면, ‘불만거리라는 용어도 괜찮을 것 같군요.

구조 안에 편입되어,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잉여들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 트위터에서 있었던 세대 갈등의 형태에서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히 영웅주의적 꾸중의 이중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40, 즉 과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던 영웅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잉여세대라는 자들은, 영 못마땅하게만 보이겠죠. 그들이 보기에, 지금의 사회가 가진 모순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불만거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청년기란 성인이 되기 이전의 유예기입니다. , 성인들이 가질 수 없는 정치적 관념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현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여할만한시기가 되는 법이죠. 이것은 전후 독일의, 낭만주의적 세대 관념, 우리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을 잘 기르자.”라는 주장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전부 잉여라는 것이 사회 내에서 만들어지는방식에 대한 구조주의적 서술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에서의 집단의례(혹은 집합의식)을 통한 구별짓기에 불과합니다. 잉여라는 구분법조차 결국 개개인들이 외재화시킨 관념인데, 이것을 개인들이 객관화시키면서, 스스로가 잉여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숙명적인 것으로만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논의는,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러한 구조라는 것이, 태초부터 존재하던 것일까요? 모든 개인에게는 원래 잉여라는 관념이 존재했을까요? 이에 대해서, 정 반대 방향의 분석을 해볼게요.

한 번 물어봅시다. 게임 좋아하세요? 아니면 뭐 취미 같은 것을 생각해볼게요. 취미활동 그거, 왜 하세요? 자기 계발? 그거 하면 뭐 돈 들어오나요? 뭐 그런 것들을 목표로 해서 취미생활을 하시는 분도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저는 사진을 찍습니다. 뭐 글 쓰는 것도 취미로 하구요. 저는 이런 활동들을 왜 할까요?

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동일합니다. 게임 왜 하냐고요? 재밌으니까요. 사진? 글쓰기? 학회? , 재밌으니까 합니다. 잉여도 동일합니다. 잉여라는 어감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짝만 말을 바꾸면 잉여는 쓰레기가 됩니다. 잉여짓은, 아무리 잘 봐줘도 헛짓거리이상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말하죠. 주류에 편입될 여지는커녕, 그 가능성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잉여죠.

실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니체의 위버맨쉬, 영어로는 over-man 이 있죠. 실존은, 쉽게 생각하자면, 생존입니다. 즉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 실존이죠. 인간이란 것 자체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주변을 공작하게 됩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생존할 수 없는 단위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수많은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실존이라는 용어를 꺼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니체의 용어에서의 초인이란, 강한 능력을 지니고, 모든 것을 이겨내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초인은 다만, 우리와 함께 살며, 모든 일들을 견뎌 내는사람이죠.

이런 실존의 사례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멋있거든요.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에 맞서는 자세. ‘이라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말이죠. 물론 그것은 분명 무리한 도전일 뿐이며, 성공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데다가, 실패할 것임이 분명한 길이기 때문이죠.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성공하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런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요.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을 준다는 것,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무한 도전이라는 예능프로그램만 봐도 나타나죠. 영화같은 데서도 이와 관련된 명대사가 많잖아요. 스타트랙의 논리는 접어두고,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라든지. 많은 영화(특히 최근 등장하는)들의 논리가 이렇죠, “생각하지 마, 일단 즐기는 거야!”.

어쨌든 다시 잉여 문화로 넘어오자면, 이렇습니다. 타칭 잉여라 불리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명상하고 있나요? 잠만 자요? 아닐걸요? 이들의 대부분은 DC 나 트위터, 오유, 엔하위키 등의 곳에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뜻이죠.

저는 이것을 잉여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 왜 해?” 라는 질문에 대해, 뭔지 모를 당당함으로 그냥!” 이라고 외칠 수 있는 그 자신감 말이죠. 스스로가 잉여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가지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일종의 예술적 가치로서 끌어올리는 것이 이러한 잉여라는 것이죠.

 장기하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혹시 인디 밴드 알고 있는 것 더 있나요? 그럼 한 번 더, 인디 밴드의 정의를 내려주실 분?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사람? 그렇다면 서태지도 인디에 속해야 합니다. 아 물론, 저는 서태지를 인디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뭐 자본력의 문제야 존재하지만, 원론적인 정의는 그것이니까요. 신해철의 경우를 볼까요? 정작 신해철... 선배님은 아니죠? 신해철은 음악 전공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게 재밌어서 하다 보니 그게 직업이 된 케이스죠. 여담이지만, 그냥 피아노로 도미솔을 쳐보고 나서 그게 뭔가 소리가 예쁘게 들려서 감동했다는 일화도 있죠. ...그래서 나온 곡이 그대에게라더군요.

다시 장기하로 돌아와서, 그가 있는 소속사는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입니다. 즉 본인이 하는 음악딴따라질이라는 말로 격하시켰죠. 하지만 그 누구고 그에 대에 뭐라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본인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랑스럽겠죠. 속된말로, 좀 비속어를 섞어서 말하자면, ‘병신 같지만 멋있어라는 말이 있죠? 그것이 바로 실존적인 행위 주체, 혹은 예술적인 잉여짓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잉여들은 이 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들(혹은 잉여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존재 자체는, 지금의 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위의 영화 분석에서 사용했던 살려줘!” 라는 외침일까요? 아니면 종교집단에서와 같이 오오 믿습니다 오오오.” 라는 식으로 현재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에이 설마.

잉여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향해 짱돌을 던질 힘, 심지어 살려줘!”라고 외칠 힘도 없는 이들이 바로 잉여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일상적 실천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며, 공작인임과 동시에 유희적 인간의 모습을 버리지 않고 생존하고 있죠.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판명난 이 잉여들. 차라리 그냥 생존의 기반을 모두 빼앗겨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죠. 아니, 하소연할 기운도 없고, 애초에 하소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구조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잉여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작은 벌레들은, 하늘을 향해 서로가 서로를 밟고 기어 올라가려고 하고 있죠. 이들이 바로 잉여입니다.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여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낸 나비는 잉여가 아닙니다. 그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회에서 성공하는, 그리하여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엘리트인 것이죠. 진짜 잉여들은 탑을 쌓은 벌레들일 것입니다. 정 비유하자면, 꽃들을 대기업으로, 벌레들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지만, 결국 다시 그 하늘에 오르기 위해 계속 그 탑에 있는... ‘벌레들일 것입니다.

잉여 자체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완충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스스로의 위치에게 부여되는 기능이 그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물론 지금까지 미뤄져 온 일이지만, 스스로에 위치에 대한 자각을 통해, 현실로 변혁을 이루어내는 혁명적 계급으로 작동할 수 있죠. 그렇기에 잉여는 위험한세대이며, 동시에 아직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벌레들에 불과하게만 보입니다.

그런 잉여들조차도, ‘구조에 대한 작은 반항을 시도합니다. 승산?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 있어 보이나요? 그렇다면, 세상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군요. 어차피 희망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하게 질러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잉여 자체의 사회적 기능을 잉여들 스스로가 부여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잉여는 잉여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미노하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는가? 이렇게 물었을 때, 대부분의 동양인이라면 네 앞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혹은 학교도서관등을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서구인(혹은 서구의 철학에게 묻는다면)이라면 어떠한가? 아마도 지금, 여기에라고 말할 것이다. 지금-여기. 혹은 Now-Here. 이것은 과거부터 지금까지 서양인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주된 관점이었다.

이러한 사상은, 멀리는 기독교의 창세기에서, 가깝게는 우리네 영화관에서 찾을 수 있다. 기독교의 신은 명령한다, “땅을 정복하고 다스리라.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물론 이 두 개의 구절은 다른 곳에 있다)” 이는 곧 비서구 문화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논리로 작용한다. 여기에, 기독교와는 다른 방향이지만, 다위니즘이 섞인다면 이는 어긋난 동정심으로 작용하게 된다.

산업혁명기, 자국 내의 발달이 극에 이르러 새로운 소비 시장이 필요해진 서유럽의 국가들은, 해외에 식민지를 개척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세계에 나갔을 때 보았던 것은, 충격의 장면 들이었다. 자신들과는 너무나 다른 비서구인의 생활양식. 너무나 불결하며’, ‘비참하고’, ‘가난한그네들의 삶이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서구인들은 일명 백인의 의무라는 것을 앞세워 좀 더 진화한 우리들이 진화하지 못한 비 백인들을 구제해야 한다.” 하는 인도적인 선언을 하게 된다라는 것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오리엔탈리즘은 환경결정론, 문화 진화론, 문명 등의 용어로 대체되어, 비서구 사회를 개척하자는 주장으로 이어진다. 좋은 환경은 좋은 문명을 발달시킬 수 있고, 그렇기에 스스로가 더 우월하다는 사고방식이 생긴다. 그것이 개척이라는 단어를 만들어냈다. ‘열등한문화를 가지고 있을 자들을 위해, ‘우수한환경에서 우수한 문명을 전해주러 가는 것이다. 물론, 대포와 기병을 앞세우고. 뭐 거기서 경제적 부가 창출된다면 그건 당연한 대가일 것이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이 있는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러한 사상은 분명히 잘못된 것이다. 문명에는 우열이 없다. 아니, ‘문화에는 우열이 없다. 문명이라는 말은 없다. 야만인(barbaric)도 없다.

서구인들이 비 서구의 문화를 연구하면서, 하나둘 믿지 못할 발견이 나타났다. 그 곳에는 이미놀라운 문명이 있었다. 오히려 자신들의 문화가 더 열등하게 느껴질 정도로. 피라미드가 있었다,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기하학적 지식이 담긴. 거대 고산 도시가 있었다, 자신들도 실행할 수 없었던 복지 사회의 정신으로 세워진. 조금 더 고산 도시에 대해 말하자면, 기원전에 세워진 그 도시에는, 엘리베이터와 상·하수도, 3~4층의 아파트가 있는 계획도시였다.

물론 이러한 것은 나중 이야기이다. 지금부터 소개할 두 권의 책에서는, 아직 제국주의가 활개를 치던 시절의 이야기이다. 근대화라는 환상이, 환상이 아닌 현실로서 살아 숨 쉬던 때의 이야기이다.

한국과 그 이웃나라들은 매우 훌륭한 지지(地誌)서이다. 당대 한국의 상황에 대한 현대사적 서술은, 식민지로서의 한국의 모습을 눈으로 보듯이 묘사하고 있다(물론 당시는 식민지가 아니었다). 문화인류학적 관점에서 관찰하는 꽤나 객관적인 시선은 한국 사회를 제3자의 눈으로 볼 수 있게 한다.

그런데 보다보면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사실은 우리나라는 정말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라는 것이다. 한국은 과연 스스로 근대화할 수 없는 상황이었는가? 식민지 근대화론의 주장이 머리를 스쳐가는 순간이었다.

당시의 한국은 정말 비참할 정도로가난했다. 국민들은 순박하기만 했고, 부정부패와 수탈로 인하여, 피착취 계급은 근면의 목적조차 잃어버린 상황이었다. 소독과 같은 의료적 지식은커녕 기본적인 위생관념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정부 관료들은 행정적 능력과는 전혀 관계없는 척도로 평가받았고, 엽관제가 성행하고 있었다. 자발적인 개혁의 가능성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구습의 폐단은 영원한 어제속에 갇혀서 변동의 가능성조차 차단해 버렸다.

여기까지가 이사벨라(혹은 대부분의 서양 학자들)의 관점이다. 하지만 과연 그러했는지는, 조금 비판적으로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미 임진왜란 이후부터 나타나기 시작한 개방성이라는 사상은 조선사회를 조금씩 바꾸어 나가고 있었다. 자본주의적 생산 관계가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모내기법의 확대를 통해 농사에 필요한 노동력이 기하급수적으로 줄어들게 되자, 농민들은 그나마 일거리가 있는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서는 돈을 먼저 지불하고 물품을 주문하는 선대제가 성행하였다. 광산은 민영으로 운영되었고, 분업에 토대를 둔 협업으로 진행되었다. 시장이 크게 발달하고 있었고, 동전 화폐뿐만 아니라 신용 화폐도 사용되었다.

하지만 역시나, 거기까지였다. 비변사의 너무나 막강한 권한과 함께, 세도 정치로 인해 생겨난 귀족 계급은 상업 자본의 성장을 방해하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 일본은 이미 서구의 문물을 (외형상으로는)완전히 받아들였다. 또한 제국주의적 사상마저 그들의 스승(영국)에게 잘 받아들인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근대화가 일어난다. 이것이 식민지 근대화론이다. 실제로 식민지 근대화론은 부정하기 힘든 학문적 정론이다. 하지만 정치적으로 쉽게 쓰이는 말과는 약간 뉘앙스가 다르다. 이 부분에서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는 것이지만, 한국은 식민지가 되었던 덕분에근대화가 된 것이 아니다. 다만, 식민지 형태로근대화된 것이다.

여기까지가 한국의 경제적근대화에 관한 내용이다. 하지만, 정말 한국은 근대화가 이루어진 국가인가? 아니, 정말 근대화란 좋은 것인가?

여기서 일그러진 근대를 보자. 일본은 매우 높은 수준의 문화적 개방성이 존재하는 국가이다. 다른 문화가 일본에 들어올 경우, 일본은 그것을 매우 높은 수준으로 자기화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 받아들이는 것이다. 이것은 섬이라는 특성으로 인한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개방이라 볼 수 있다. 동부 아시아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근대화된 국가라는 사실이 그것을 가장 잘 보여준다.

하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는 전혀 근대화(혹은 서양화)되지 못했다. 한국인에 대한 가혹한 식민 정치나, 경찰 권력의 폭력성 등은 서구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 같다. 서구 국가에서는 이들을 보고 그래봤자 야만인이라는 의견이 지배적으로 변하게 된다. 이러한 의견은 현재까지도 이어진다.

필자가 한번 물어보겠다, 한국은 과연 근대화된 국가인가? 서양은 진정으로 근대화되었는가? 필자는 근대화를 이렇게 규정해보겠다.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합리적인 사고방식이 사회의 보편적인 담론을 구성하는 것.” 이렇게 본다면, 아직도 한국에서는, 아니 세상 어느 곳에서도 진정으로 근대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이루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진보적 사유라는 가장 포괄적인 의미에서 계몽은 예로부터 인간에게서 공포를 몰아내고 인간을 주인으로 세운다는 목표를 추구해왔다. 그러나 완전히 계몽된 지구에는 재앙만이 승리를 구가하고 있다. 이디오진크라지 라는 말이 있다. 무언가에 대해 동물적인 본성으로 싫어하는 것으로써, 문명화된 현대인에게도 남아있는 무조건반사 같은 것이다. 반유대주의라는 광기는 계몽이라는 합리성이 빚어낸 이디오진크라지이다.

주체의 타자에 대한 광기에 가까운 적대감은 서구 사회에서조차 사라지지 않은 상황이다. 오리엔탈리즘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것이다.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든다.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고,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든다.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의 하나가 언어를 사용한 비판이다. 비판을 통해서 상대와 나를 구별 짓는것이다. 이렇게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된다.

그렇다고 해서, 주체와 타자를 구분하는 것을 나쁘다고 비판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분명 생존의 논리이다. 타자들도 분명히 살려줘!” 라고 외치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주체가 먼저 살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주체들도 외치고 있다, “살려줘!” 라고. , 그대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찌할 것인가? 일단 쏘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똑같은 것이다.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스타에서 미네랄 캘 때 죄책감을 느낄 리는 없다.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끼는가? 만약 그대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바로 주체이다.

다만 그 생존의 논리가 정치적 논리로 확대되어 오용될 경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할 뿐이다. 일본에 대한 야만적이라는 비판은 일본마저도 아시아의 국가임을 뛰어넘지 못하게 하는 담론을 낳았다. 이러한 것은 당대의 진화론적 사고방식을 강화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근대화의 과정에서는 고통이 따른다.” 라는 주장을 비판하고 싶다. 이 무슨 마초스러운 발언인가. 그렇다면 서양은 남성이고 동양은 순결한 여성이라는 뜻인가? 저 구절을 읽으면서 소름이 끼쳤다. 저 문장이 바로 남성주의적 시각의 오리엔탈리즘의 결정체이다. 서양인에게 있어, 동양은 신비로움과 부드러움, 보물들로 가득한 환상의 나라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서양인은 동양인들을 계몽하고 다스리며 복속시켜야 한다고 스스로를 합리화했다. 계몽의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성, 그렇게 다시 계몽의 목표물이 되었다. 이제 다시 계몽을 계몽시켜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Posted by 미노하
 삶에서는 많은 선택들을 하며 살아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쓸까 아니면 그냥 쓰다가 졸리면 잘까 하면서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다가온다. 그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자신의 사고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순수한 의미로서의 자유의지는 절대로 침범당하지 않는다고. 틀렸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분명히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심지어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사회의 영향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필자라면 먼저 도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도구가 없는 곳에서의 인간(이것을 인간이라고 가정한다면)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또한, 과연 그것에 대한 생각을 ‘어떤 언어로’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회의 영향력이다. 이렇듯, 개인은 분명히 사회의 영향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회 안에서 주어지는 선택의 경로만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가? 사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사회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경로는, 엄청나게 많다. 정말 이것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 것마저 사회는 우리에게 허락한다. 군중심리? 다른 사람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길인데 선택해도 되느냐고? 그렇다면 그대가 ‘허락’하는 1인이 되면 그것을 따라오는 이는 많다. 여담이지만, 불행하게도 필자는 ‘허락’받는 2인자의 길을 걷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을 한 일이라면, 아마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란 정말 특이한 공간이었다. 그전까지 이루어지던 수많은 인간관계와는 다른, 정말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첫 번째 공간이었다.

 하지만, 난 그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고등학교라는 넓은 세상으로 내어 쫓긴 나였다. 그러한 고등학교 생활에서, 어쩌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이 동아리였다. 운 좋게도, 알고 지내던 형이 ‘에클레시아’ 라는 기독교 동아리에 있어서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 날 이끌어 준 것이 우리 ‘기독동아리 연합’ 이라는 소속감 이었을지도 모른다. 학교라는 공식적인 집단 안에서, 그러한 소속감은 나의 길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나 자신만의 틀 안에서만 살아가던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에클레시아 안에서 나는 영상(미디어)팀에 있었다. 사진과 영상의 촬영에서부터, 편집까지를 담당했다. 예배 때 카메라를 잡고 있는 것은 거의 다 우리였다. 지치고 힘들 때도 많았고, 그만 내려놓고 싶었던 적은 셀 수도 없었다. 성적이 떨어진다고 욕을 먹은 적도 있었고, 다칠 뻔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나는 성장했다.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각의 크기와 신앙심까지,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두 번째 큰 선택은, 역시 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몇 년 여간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독서. 정말 우연하게 들은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현재에 충실해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독서를 추천했다. 그 때부터 나는 독서를 취미로 삼았다.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던 것도 있지만,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읽은 책이 일주일에 한권 정도. 그것도 고등학생 수준의 책이 아닌,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는 책들이었다(물론 그 책들이 교재로 쓰인다는 사실은 대학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고등학교 2, 3학년 시절동안 약 80여권. 순수하게 재미로 읽었던 가벼운 책(판타지, 현대소설 등)을 합하면 약 4~5백 권 정도 될 것이다.

 여담이지만, 고3 시절에는 공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열심을 다해서 했던 것 같다. 디데이 100일부터 보았던 영화가 약 70편에, 드라마가 약 20시즌 정도를 보았으니...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배경 지식이 되어서,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지만, 당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놈’ 으로 보았다. 상식적으로, 수능을 준비하는 고3 학생이라면 문제집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정말 그 해의 내 수능 점수는 ‘평소처럼’ 나왔다. 당시의 내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은 ‘재수’였다. 우리 때의 수능이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08학번의 수능이었다. 나와 같은 재수의 길을 선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다. 나는 그 곳에서도, 꿈을 좇고 있었다. 나의 꿈 또한 조금 특이했다.

 나는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이 글이라서 쓰는 가식적인 말이 아니다. 난 진짜로 사회학이 하고 싶었다. 사회학의 길을 선택한 경로조차도 그리 평범하진 않았다. 사회학을 처음 생각했던 때는, 하나님(필자는 개신교도이다)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고1 여름 수련회 때였다. 중 3때까지는 안티크리스천에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얼결에 지원하게 된 기독동아리에서 큰 이질감을 느꼈다. ‘내가 존재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자에게 이렇게 열심히 기도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수련회 때 저녁 부흥회 시간에, 저는 정말 우연히 맨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질감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 때 ‘나도 한번 따라 해 보자’라고 생각했고, 주님을 만났다. 처음 든 생각은 무엇보다도, 그 감격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게다가 믿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죽어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 그들이 생각났다. 중국(그 수련회의 주제였다)과 아프리카. 그 곳에서 베토벤이, 셰익스피어가, 칸트가, 단지 그 곳에 태어났단 이유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많은 가능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때 가진 꿈은, ‘지원해 주자’가 아닌 ‘한 번 바꾸어 보자’였다. 그때부터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재수생으로서의 할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 사람이 하루에 잠자는 시간, 식사시간, 쉬는 시간을 빼고 남은 모든 시간을 공부에 ‘부을’ 수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의외의 결과였다. 정말 내 하찮은 머리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점수가 나왔다. 그 때 나는 사회학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다. 아마 그 당시에는 내 꿈보다 돈을 더 쫓고 싶었나보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전공이 ‘경제학’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공부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는 것. 학교를 선택하던 순간에는 몰랐지만, 대학에 와서 정말 ‘넓게’ 배우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해 주었던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고등학교 일을 도와주면서였다. 배재고등학교에서 하는 ‘아펜젤러의 두 번째 기도’ 라는 집회가 있다. 형식은 항상 바뀌지만, 그래도 매년 반복되는 ‘뮤지컬’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거기서 09년의 나는 뮤지컬을 도와주게 되었다. 

 어느 날, 동아리 OB(졸업생) 모임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래서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고등학교에 갔다. 그래서 들은 말이 “너 뮤지컬 대본 좀 써라” 라는 말이었다. 사실, 적성에도 맞지 않던 공부에 지쳐가던 나는, 그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본 쓰기에서 끝나지 않고, 뮤지컬의 감독을 맡았다. 물론, 말이 감독이지 발성훈련, 호흡훈련, 연기지도, 안무 짜기, 당일 촬영과 보컬로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들을 하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보았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보았고, 내가 가졌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냈다. 

 그 때 선택했던, 내 인생에서 가장 미친 짓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이, 다시 한 번 수능을 보는 것이었다. 정말, 절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학을 배운 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여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자의 경제학 성적은 C+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때의 상황에서는 아무도 내 생각에 동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고민했던 것은 배부른 현실과 배고픈 꿈 사이의 중간점을 찾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최소한 나의 기준에서, 사회학은 원래 전공하던 학문보다는 훨씬 ‘배고픈’ 학문이었다. 그때 내가 전공하려던 것이 경제학과 응용통계학의 복수 전공이었으니까, 아마 절대로 굶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을 하겠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듣는 말은 “그게 뭐야?”였다.

 그 때, 내가 사회학을 할 만한 용기를 가지게 해 주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 그 분의 전공이 사회학이었고, 그래서 난 사회학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 말했지만, 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잘 가지 않는다. 어쨌든 그 분마저도 내가 다시 수능을 보겠다는 말에 그냥 ‘응원’ 만을 해 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래! 너라면 잘할 거야~!” 라고 하던 얼굴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래도 나름 잘 해냈다는 것. 그래도 재수 때만큼의 성적을 유지해내는 것은 성공했다. 물론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그 중요한, 학교의 선택이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좋은’ 학교를 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야 한다고, 나는 그런 ‘전도유망한’ 학교를 가서 ‘편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들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처음부터 보았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힘들게’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나는 서강대학교에 진학했다. 더 좋아 보이는 길들이 있었다. 괜찮아 보이는 방법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곳 로욜라 도서관에 있고, 이 글을 쓰면서 잠을 깨려고 별의별 스트레칭을 다 하고 있고, 이 글을 어느 정도 쓰다가 엎드려서 한숨 잘 계획이다. 그 후에 잠이 깨면 기지개를 펴고 다음 수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선택 몇 가지가 있다. 지난 2월 한 달간 했던 일들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신입생들에게 2월은 바쁜 달이다. 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았는데 학교와 집을 오가고, OT와 입학식, 신입생환영회 등을 다니며 사람들을 알아가야 할 시기였다. 그리고 난 그때, 연애를 택했다. 정말 짧은 기간 동안의 연애였지만 그래도 나는 절대 그 일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수강신청이나, FA제도 같은 것은 혼자서도 배울 수 있었고(이건 진심이다, 어차피 학교별로 큰 차이는 없으니까) 주된 수강과목도 다른 1학년들과 겹치는 수업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수강신청기간에 교회 수련회에 있었다. 나에게 교회 수련회란, 매우 소중한 일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 고1때의 여름 교회 수련회 때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의 수련회가 나에겐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수강신청을 하는 시간대(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녁8시부터 12시였다)또한 예배시간과 정확하게 겹쳤다. 즉, 교양과목은 한 개도 신청하지 못했다. 내가 수강신청을 했던 시간은 다음날 수강정정기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최종적으로 신청한 과목은 이렇다. 사회학개론, 사회조사방법론, 사회학사, 정치학개론, 일반심리학, 인류학개론.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1학년이다. 위의 목록에서, 필자 혼자 1학년으로서 수업을 듣는 것이 3개정도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라는 사실이다. 나의 인생 중, 2년의 황금기를 멀리 돌아오고 나서야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이기에 즐겁게 행할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지금 이 글은 며칠간 쓴 것이기에 문체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을 주로 쓰는 공간은 로욜라 2관 4층 노트북 사용가능 테이블이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곳은 우리 집 거실 바닥이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이다. 이 큼지막한 노트북을 꺼내는 것 자체가 속된말로 ‘쪽팔린’ 일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지하철에서 잠이 오지 않고, 읽을 만한 책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글이라도 쓰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한 번의 여담이지만, 사회학 한다는 놈이 이렇게 사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아서야...

 지금까지 이 글을 쓰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정말 고등학교 이후의 나의 삶은 ‘내 멋대로 살았다’ 라고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최근에 겪었던 많은 일들을 보면 말한다, “넌 왜 이리 인생에 굴곡이 많아?” 라고들. 내가 굴곡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꿈을 좇기에는 충분히 험난한 곳이다. 그런 험난한 곳을 살아가면서, 이 정도라면 그래도 잘 산 인생이 아닐까?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회에 속해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에게 추천하는 수많은 길들이 있다. 선택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추천하지 않는 몇 개의 길이 있다. 나는 그 중에, 한 번도 추천받지 못했던, 한 개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여러 번. 그래서 나온 결과는, 항상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많은 길들이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에 만족한다. 그렇지 못한 삶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어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타카’ 라는 영화가 있다. 유전자로 인한 차별과, 그것을 극복하는 주인공을 그리는 영화이다. 지금도 가끔, 너무 하루하루가 힘들다 느껴지면 그 영화를 본다. 주인공은 “실패를 생각했다면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었어.” 라고 절규한다. 숨이 전혀 차지 않는 것처럼 달리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을 듯이 숨을 쉰다. 심장마비에 걸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심장으로 그 누구보다도 오래 달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경쟁들을 하나하나 승리해 나간다. 

 과연, 실패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실패라 규정지어야 하는가? 물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사회의 규범을 벗어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많은 ‘틀’ 들이 과연 우리가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인가? 막스 베버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성의 쇠장 iron cage 안에 갇혀 살아간다고. 난 지금 이성의 틀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이성의 틀을 조금만 넓히는 것이다. 실패해도 좋다. 아니, 십중팔구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 한둘은 성공하지 않는가? 그 한두 가지의 성공이,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루었지 않는가? 어느 소설가가 말했듯이, "세상에 필요 없는 건 영웅, 현자, 성자.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건 멍청이, 얼간이, 바보" 이다.

 니체는 ‘적극적 허무주의’ 에 대하여 말했다. 이성으로 인하여 절망적인 사회에서, 시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번 더 해보라 말한다. 그가 비이성적인 사람인가? 그는 단지 그 절망적인 상황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희망을 볼’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충분히 과거보다는 좋아진 사회이다. 충분히 열려 있는 사회이다. 충분히 원하는 꿈을 좇을 수 있는 사회이다. 과거에는 꿈을 좇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위대한 업적들은 과거에 많고 많게도 쌓여 있다. 그렇다면, 지금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무엇인가?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아니, 실패 그 자체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실패했다고 다시 한 번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저 실패자일 뿐이다. 다시 한 번 시도할 때, 그는 ‘도전하는 자’ 이다. 그리고 나는, ‘도전하는 자’ 이다.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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