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지부조화'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24 0401 보이스포럼
  2. 2011.07.22 문화이론 연구

아 혹시 인류학개론 들으신 분 있나요? 그럼 말이 편해지는데.. 없나요? 그냥 제가 설명할게요.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설명하고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비는 왜 옵니까? 그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고대에는 이런 과학적인 이론들을 아마 몰랐겠죠. 그래서 뭐.. 요정이 했다거나? 뭐 그런 설명들을 했겠죠. 바로 이거에요, 설명. 힌두 신화였나? 아무튼 거기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거대한 거북 위에 있다고. 누가 묻죠, 그럼 그 밑에는? 그래서 대답해요, 그 밑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고. 하지만 그 밑에의 밑에의 밑에는? 모르죠. 그 때 무한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무한히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우리에게는 세계이지만) 거북 한 마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말이죠. , 이 때 무한대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창세기, 혹은 태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베레시트와 정확히 동일한 이치죠. 사실, 아직도 창조론이 창조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논리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 존재했던 자들인가? 그럼, 이 모든 물질들의 태초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아 여기서 원래 '이집트 왕자' 장면 가져와야하는데.. 뭐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 장면입니다. 모세는 불꽃을 향해 물었죠, 당신은 누구냐고. 기독교의 신은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됐다는 것이죠.

빅뱅이론을 설명해볼게요.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물리학 지식이 필요합니다만.. 그냥 들으세요 뭐. 우주는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도플러 이론 정도는 아시죠? 그 기차 같은 거 지나갈 때 슈웅 하고 소리의 주파수가 바뀌는 거. 원리는 단순해요. 관측자에게로 다가오면서 생겨나는 음파는 주파수대가 점점 높아지고, 멀어질수록 주파수대는 낮아집니다. 여기서 주파수란, 파장의 진동수를 말하는 것쯤은 다 아시죠? 이러한 주파수의 변동 현상이, 우주에 있는 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일단 먼저, 빛은 파장의 성질을 가진 물질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어쨌든, 대략 50년 전쯤에 관측한 별빛의 주파수와 현재 관측하는 별빛의 주파수가 다른 것이 계속 관찰되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이렇게 우주가 계속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볼게요. 지금은 확장하는 우주니까, 축소하는 우주로 바꿔서요.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그니까 우주가 전혀 확장하기 이전, 우주의 모든 물질들이 하나의 이라 말할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 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태초에는, 우주 전체라는 엄청난 질량(혹은 에너지) 가 그런 작은 공간 안에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질량들의 균형이 무너지는사건이 일어나요. 그 때, 물질과 반물질이 떨어져 나가요. 그렇게 균형이 깨지며 동시에 대폭발, 즉 빅뱅이 일어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의 방법으로 등장한 이론들에는, 유신진화론, 지적설계론, 젊은 지구 창조론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의 대부분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죠.

먼저 유신진화론이란 최초의 빅뱅 자체에 신의 의지가 개입하였고, 그 후의 진화의 모든 형태가 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쪽에서 공식적으로인정하고 있으며, 그나마 가장 무난한 창조과학의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에 의해서도 될 수 있겠죠?

다음으로 지적설계론 이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정교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설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최신의 창조과학 쪽에서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구의 역사는 대략 5,000 년 정도인데 반해, 지질학 쪽에서 이야기하는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입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말이죠.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창조과학이란, 그저 졸렬한 타협의 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먼저 생각해봅시다, 과학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보편적인 증명이 가능한 이론들의 총합입니다. 그리고 창조론은,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하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는 가능할까요? 이에 대한 제 대답은, 공존은 가능하되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개신교에는 가톨릭과는 다른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주장했던 다섯 솔라 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라는 말인데요, 이 말인즉슨 모든 것은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신의 존재는 물론, 그분이 하신 모든 일까지 말이죠. 창조에 대한 것은 당연히 포함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론은 '믿는' 것이며, 창조과학은' 알고자 하는 시도' 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신앙에서는 'sola gratia' 라 말합니다. , 은혜가 없이는 알 수조차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심지어, 창조과학은 과학적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인지부조화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패러다임이요? 그들에게 창조과학이란, 신앙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평행선입니다. 절대 만날 리 없는 것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충돌할 이유도, 서로에 간섭할 권리도 없습니다. 창조론은 지식이 아니며, 진화론은 신앙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이런 젓가락과도 같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서로 충돌하면서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죠.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혹은 디도서 3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심지어 바로 다음 디도서 32절에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라는 말로써 '건전한 비판'마저 '비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신앙과의 연관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sola gratia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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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필자의 경우는, 기독교 가정에서 자라나, 평생을 기독교인으로서 살았다. 물론 그 기간 동안에는 종교적 편향성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이 더 길기는 하지만, 어쨌든 종교를 가진 사람들, 특히 개신교라는 강력한 통합수단 안에서 살아왔던 시간이기에, 나 스스로는 기독교인이라는 정체성이 형성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이론 연구의 가장 큰 연구목적일지도 모르는, ‘자기 객관화를 위해서 개신교 자체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다.

개신교란, 매우 강한 집합의식을 형성시켜주는 종교단체에 속한다. 과거 뒤르켐의 연구에서는, 가톨릭이 강한 연대감을 지니고, 그 것은 낮은 자살률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러한 가톨릭의 특성들은, 현재의 개신교, 특히 한국 개신교로 옮겨왔다.

예를 들자면, 과거 중세 가톨릭의 경우, 경전에 대한 해석은 성직자에게 모두 맡겨졌다. 개인은 경전(개신교에게 있어서, 성경)에 대한 해석이 매우 제한되었다. 물론 과거 가톨릭처럼 접근권한 자체가 일반인들에게 금지된 것은 아니지만, 일반인의 견해와 전문가의 견해가 충돌할 경우, 성직자의 견해를 무조건 우선으로 둔다. 일반인이 알고 있는 사실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사실이 다를지라도, 함부로 지적해서는 안 된. 이는 기독교 경전(이하 성경)에서의 비판하지 말라라는 명령에서 기인한 것인데, 이 말은 정치 이데올로기로까지 연관된다.

또한 잦은 의례를 통해, 개인이 살아가는 삶의 시간 배치를 교회 중심으로 돌아가도록 변화시킨다. 예를 들자면, 매주 있는 예배와, 매년 어느 절기마다 있는 집단의례가 존재한다. 이는 예배뿐만 아니라, 운동회, 바자회, 봉사활동 등의 형태로도 드러난다. 그런데 이러한 의례들은, 참여하지 않는 자에 대한 유, 무형의 압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러한 사고방식의 근원은 무엇보다도 세상을 주체와 타자로 구분하는(레비-스트로스의 경우에서는 성/속 의 구분법이었지만)에서 온다고 할 수 있다. 자신과 같은 행동, 혹은 같은 의례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우리들에 속하고, 그것이 아닌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이라 칭하며 멀리해야 하는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이러한 분위기자체는, 전통에 대한 강조에서 나온다. 물론 이 전통이란 것도, 한국만의 전통일 뿐이다. 그 대표적인 예시가 바로 기복신앙의 성격을 지닌 개신교이다. 이러한 분위기로 인하여 결국 교리 자체는 일반인들에게 매우 쉬운 방법으로 다가서게 된다. 어려운 교리는 모두 전문가(성직자)의 영역으로 돌아가고, 그러한 것에 접근하려는 일반인의 시도 자체를 네가 어딜 감히라는 말로 막아버린다. 이로 인하여, 성경 그 자체보다는 그에 대해 설명한 책만을 소비하고, 또 양산하게 되는 구조를 만들어 버린다.

그런데, 위에서 말했던 개신교의 특징들은, 과거 종교개혁시기 가톨릭의 모습과 놀랍도록 흡사하다. 이 원인을 필자는, 종교의 형태 자체가 결국 고도화됨에 따라, 어떤 특정한 모습을 지니게 된다는 가설로 설명하려 한다. 하지만 그것을 설명하기에 앞서, 그러한 정당화 논리들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그리고 그것이 현실에서는 어떤 담론 형태로 표현되며, 어떤 의례 형태들을 통해서 강화되는지에 대해 알아보려고 한다.

그러한 구체적인 형태를 알기 위해서는, 문헌 조사나 단순한 경전 자체의 비교를 논하는 것만으로는 매우 부족하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이미 참여하고 있던 예배에, 관찰자의 입장으로 참여하려 시도해 보았다. 모든 관찰자가 겪는 과정이 그러하듯이(물론 의도한 적은 없었지만), 필자도 비참여 관찰자 - 비관찰 참여자의 과정을 거쳐 왔. 그러므로 이제, ‘참여 관찰자의 입장에서, 필자가 참석하는 예배를 구조주의적 논의(특히 문화인류학적 관점으로)로 해석해보려 한다.

 

매주 토요일. 명성교회 본당에서의 일이다.

원래 토요일 예배는 대학생들만의 예배이다. 명성교회는 사실, 교회에 출석하는 사람에 비해 예배당이 부족한 편이다. 그렇기 때문에 청년들만의 예배는 토요일로 옮겨왔고, 그 것은 어느새 전통으로 굳어졌다.

청년들만의 예배란, 일반적으로 다른 교회에서의 청년부 예배를 뜻한다. 명성교회의 경우는, 대학생과 청년들이 따로 예배를 드린다. 대학생들을 모아놓은 곳을 대학부라고 부르며, 보통 대학에 다니는 시기 동안에는 이곳에 출석한다. 대학을 졸업한다거나, 취직 등을 한다면 청년부로 간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이후에도 대학부에 남아있는 경우는 많이 있다. 하지만 남자의 경우 30세 이전까지, 여자의 경우 27세 정도까지 버텼다가청년부로 간다. 청년부를 졸업하는 조건은 결혼이다.

맨 처음 교회에 도착하면, 거대한 구조물이 나를 반긴다. 높이 솟은 첨탑과 그 위의 십자가는, 하늘까지 닿아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리고 예배당 정면에 있는 12칸의 계단. 예수의 12제자를 기념하려는 의미로 그러한 숫자를 사용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그 계단에서는, 신의 위대함을 간접적으로나마 표현한다. 그 위압감은, 일종의 안도감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내가 없어도 이 교회란 곳은 지속적으로 있을 것이라는 일종의 확신, 그리고 그 확신으로 인한 편안함.

예배당에 들어가면, 어슴푸레한 조명이 나를 반긴다. 스테인드글라스의 화려하지만 소박한 조명에 대부분의 조명을 의존하고 있다. 자연광에 의존하는 조명으로 인해, 강한 명암의 실내풍경을 만들어낸다. 그 풍경은 일종의 신성함마저 느껴질 정도이다. 이곳에서는 신에 대한 생각 외에는 다른 세상적인생각을 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예배의 시작은 4시이다. 4시에 예배가 시작되는 것은 겨우 3개월 정도 전부터 정해진 것이지만, 거대한 교회와 많은 사람들, 그리고 예배를 준비하는 많은 사람들에 짓눌려, 매우 오래 된 전통인 것처럼 느껴지게 된다. 안정감을 얻기 위해, ‘거친 세상에서 피해서 휴식을 얻기 위해 온 사람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전통이라는 느낌은 소외가 아닌, 오히려 편안함으로 다가오게 된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자 스테인드글라스에 커튼이 쳐진다. 조명이 대부분 꺼지고, 고풍스럽게 장식된 벽등에만 불이 들어온다. 아직은 같은 팀의 사람들을 찾아서 함께 예배드리려는 생각으로 전화하는 소리가 분주하다. 불이 꺼지고, 정면에 있는 프로젝터 화면에 기도로 예배를 준비합시다라는 글씨가 떠오른다. 그와 함께 그러한 분주한 소리는 속닥거림으로 바뀐다.

불이 꺼지면 밴드의 음악이 시작된다. 밴드의 구성 자체는 일반적인 록밴드의 형태이다. 조용한 음악이 키보드와 신디사이저에서 흘러나오고, 일렉트릭 기타의 웅장한 소리가 그 위를 덮는다. 음악을 통해서 긴장을 풀어주고, 조명을 어둡게 만들어 스스로의 모습을 감추어준다. 기도를 하기 위한 조건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렇게 신에게로 다가가기 위한 일종의 자기최면상태에 빠진다.

이것을 자기최면으로 보는 것에는 합당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이유가, 음악이 없으면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점이다. 자기최면이 아니라 진정으로 신께 기도하며 나아가는 것이라면, 그러한 보조적인 수단이 없어도 똑같이 집중할 수 있어야 한다.

더 큰 이유라면, 앞자리에 있는 사람만일수록 이러한 의례적 과정에 집중하기 쉬워진다는 점이다. 어떤 예배를 가든지 강조되는 말이 있다. “앞자리에 은혜가 있습니다.”라는 말이 그것이다. 여기서 은혜란, 축복이란 말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그런데 이것 역시 인지적 타협의 결과이다. 한국의 개신교 특성상, 토속종교의 기복 신앙적 성격을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앞자리로 오려면 결국 예배에 가기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하고, 그 만큼 삶이 예배를 위해 구조화되어야한다. 매주 반복되는 예배라는 의례이지만, 그 것을 위해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더 열정적으로 참여해야한다. 이는 교회라는 집단의 문화형태가 이데올로기적으로 강조하는 것이다.

4시가 되기 약 10분 전 정도에는 슬라이드 쇼를 사용한 동영상이 영사된다. 동영상은 보통 과거의 성인들이나, 현재 교역자에 대한 미담들, 그리고 기적에 대한 이야기 등이다. 동영상의 음악은 보통 명상용 음악의 멜로디를 따라간다. 일반적인 찬송가를 가져다 쓰지만, 뉴에이지풍의 멜로디가 강조되기 때문에, 음악 자체에 집중하지 않게 된다.

특이한 것은, 약간만 생각해 보면 현재의 교회의 정통성을 약화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도 있다. 오늘 나온 동영상은, 과거 신사참배를 반대했던 목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오히려 명성교회가 속해있던 교단은,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장로회 교단에 속한다. 과거에 대한 반성 없이, 현재 우리만 잘 믿으면 된다는, 졸렬한 타협의 한 방법인 것이다. 그렇다고 현재 잘 믿는 것도 아니다. 방금 말했던 자기최면의 예를 생각해보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다고 생각하는(혹은 착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조금 극단적인 용어를 동원하자면, ‘인지부조화라고 할 수 있다. 자기 주변의 것들을 해석하는 양식이, 자기 자신만의 합리성을 동원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잘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은 믿음이 좋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했기 때문이야.”라고 쉽게자기 주변의 세상을 설명한다. 또한 스스로의 불행에 대해서조차, “내가 열심히 안해서 그래.”라는 말로 합리화시킨다. 결국 어떤 방식을 통해서나, ‘참여도자체는 올라갈 수 밖에 없다.

현재의 교역자에 대한 미담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한다. 오늘의 경우는 아니지만, 대부분 동영상은 명성교회의 당회장 목사에 관한 이야기를 주로 다룬다. 예배를 더 열심히참여하고, 교회를사랑하며, ‘세상 사람들로부터 스스로를 구별 지어 경건하게살아야 한다는 주장이 주가 된다. 그렇게 열심히 교회를 다니고, 더 열심히 참여하고, 구별된마음을 지니고 살아가면 자신처럼 축복받는다는 내용인 것이다. 교회 내의 수많은 예배들 하지만 이 역시, 그러한 사람들과 현재의 공동체와는 그리 큰 연속성이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상상의 공동체로서 만들어진것이다.

동영상이 끝나면, 무대의 조명이 켜진다. 하지만 여전히 회중석은 어두운 상태이다. 회중으로 하여금 더 예배에 집중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리고 예배는 시작된다.

예배의 시작은 찬양이다. 맨 처음 오자마자 사람들은 앉아있었기 때문에, 찬양이라는 일종의 통과의례를 통해서, 예배하는 사람들로 만들어내는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경계의 설정도, 어느 정도의 연결성을 지녀야한다. 세상과 완전히 구별된다면, 교회라는 공간은 세상과 유리된 공간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찬양의 시작은 기도이다. 여기서는, 누군가가 대표로 기도를 하는 것이 아닌, 주기도문이라는 형식을 가져온다. 주기도문은, 2,000년 전 예수가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고 하며 알려주었던 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은 연결적인 기능을 지니는데, 첫째로 세상과 예배를 연결하며(기도하는 방식은 세상과 교회가 일치하므로), 2,000년 전과 현재를 연결하여, 재림할 예수라는 종말론적 기대를 다시 개개인에게 각인시킨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기능이라면, 예배가 시작되기 전부터 각자가 하고 있던 자율적인 기도의 수많은 형태들이, ‘주기도문이라는 하나의 형태로 통합되는 것이다. 각자가 기도(혹자는 명상이라고도 하지만)하는 내용은 모두 다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이렇게 합쳐진 기도는, 강력한 소속감을 불러일으킨다.

주기도문이 끝나면, 인도자는 다 같이 일어나서 찬양합시다.”라고 말한다. 그럼 다들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는, 다 같이 열정적으로 찬양하기 위한 의지에서 나오는 것이다. 참석자들의 자기최면적 열정을 더 강하게 이끌어내기 위해서, 각각의 개인들로서 서는 것이 아니라, ‘우리로서 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회중석의 불은 꺼지고 무대의 조명은 매우 화려하게, 다 같이 서서, 가끔은 뛰며, 열정적으로, 땀을 흘려가며 찬양한다. 나 혼자 뛰는 것이 아니라, 다 함께, 무대라는 한 방향(혹은 종교적 상징물, 십자가 등)으로 자신들의 찬양을 던진다.

이정도 몰입은 절대로 혼자서는 이를 수 없는 단계이다. 물론 진정한 신앙인(혹은 종교적 사고방식을 충분히 체화시킨 사람)이라면 어느 곳에 있어도(심지어 골방, 혹은 광장에 홀로 있어도) 이 정도의 집중도를 만들어낼 수 있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정도의 소란속에서 몰입을 만들어낸다. 앞자리일수록 몰입이 잘된다는 것 또한 그러하다. 이 과정에서는 음악적 소양이 매우 강조되는데, 악기 연주자뿐만 아니라, 참석하는 사람들에게 또한 그러하다. 최소한, 자신이 부르고 있는 노래 자체에 대한 이해가 요구되는 것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모든 악기가 정지한다. 그리고 목소리만으로 찬양하게 된다. 이러한 기묘한 침묵은, 매우 강한 통일감을 만들어낸다. 악기들의 화려함 속에서, 각자 다른 소리들을 내고 있던 사람들이지만(화음이라든지, 음 이탈, 딴 짓 등), 그 순간만큼은 스스로의 소리를 줄이고, 주변 사람들의 소리에 맞추어, 하나의 소리를 내(야 하)는 것이다.

이때는 성가대석의 소리가 빛을 발한다. 대학부 예배가 아닌 평상시의 대예배에서는, 성가대가 앉아야 하는 자리가 있다. 대학부 예배에서도 일종의 찬양대를 만들어 세운다. 이들은 가만히 서서 찬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만의 율동을 만들기도 하고, 크고 우스꽝스러운 동작으로 박수를 치기도 한다. 그러한 그들의 찬양하는 모습자체는, ‘우리도 저렇게 열정적으로 찬양해야 한다!’는 시각적 목적의식을 만들어준다.

매우 강한 음악, 특히 록 계열의 음악이, 드럼(특히 킥 드럼의 강한 저음)과 일렉트릭 기타의 몽환적인 소리와 합치된다. 여성 보컬의 화려한 기교에, 목소리가 강조되는 찬양형태들을 통하여, 최면상태는 더욱 강해진다.

이때부터는, 찬양을 하며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 ‘방언하는 사람들 등이 나타난다. 각각의 개인들은 눈을 감고 찬양에 집중한다. 영상을 통해 다른 사람들(특히, 눈물을 흘린다거나 동작이 아름답다거나)을 보여주어, 서로의 감정을 고조시킨다. 영상은 계속 바뀌며, 자신이 잠깐 나오더라도, 집중에 도움을 주는 수준에서 멈춰준다. 각자의 소리가 있겠지만, 모든 수단을 통해 그것을 일치시켜주려 노력하는 것이다.

이러한 노래들은 결국, 가사의 내용이 아닌, 노래라는 형식 자체에 집중하도록 해 준다. 처음엔 조용하다가, 악기가 하나씩 추가되고, 여성 보컬의 솔로로 집중시킨다. 찬양의 가사 자체는 결국 종말론의 반복으로, 현재 사회현실(특히, 교회의 처지 측면에서)에 대한 비판을 통해 성령이 임하셔야 한다는 강조의 입장을 취한다. “주를 떠난 이 땅 위에 오소서 성령이여.” 라는 가사이다. 보수교회, 게다가 대형교회라는 입장에서조차, ‘우리들은 주를 떠난 것이라고 한 번 더 강조하는 것이다. “너희들은 죄인이다라는 이데올로기를 개인이 체화시키려면, 몰입이 필요하다. 주체와 객체가 허물어지고 있다는 인식을 너희들이 저들과 똑같아지고 있다!”라는 말을 통해, 경계심을 유발하고, 그러한 경계자체의 존재를 정당화한다.

밝은 - 고조되는 - 흥분하는 - 진정시키는 - 결국 스스로를 보게 하는 이러한 찬양의 순서들을 통해, 스스로의 내면은 더욱 어둡고, ‘성령의 빛으로 화려하게 밝혀야 할 것처럼만 보이게 된다.

노래 가운데는 간주 부분이 있는데, 이 과정에서는 각자가 눈을 감는다. 이것은 음악감상 이상의 의미를 강요하는데, 이 때 각자는 기도를 한다든지, 아니면 가사를 묵상해야 한다. 다들 그렇게 하고 있다고, 영상과, 주변의 소리 등을 통해 개인에게 다가온다.

이러한 찬양들이 끝날 때는, 위를 향해 박수를 친다. 시작과 끝의 동일성을 통해, 수미일관성을 만들어내며, 동작 자체를 통해 찬양이라는 강조를 보여준다. 스스로의 열정이 아니라 찬양 그 자체가 된다는 것을, 이데올로기적 수단을 통해 강조하는 것이다. 이러한 팔동작 자체는 의미가 부여된다. 위를 향하는 손은, 각각이 다른 의미를 지닌다. 신께 도움을 구한다, 영광을 돌린다 등의 각각의 다른 모양은, 팔과 손의 형태들에서 의미가 형성된다.

이러한 모습들은, 처음 온 사람으로 하여금 적응하기 힘들도록 만든다. 이를 통해, 잦은 참여를 강조하는 것이다. 이것은 배타성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믿음의 눈으로 세상을, 주변의 사물들을 관찰하면, 각각이 다른 의미를 보이며, 그 것을 보는 능력 자체는 권력으로 작용한다.

찬양이 모두 끝나면, 혹은 그런 분위기가 만들어지기 시작하면, 인도자는 기도를 하자고 말한다. ‘주여라고 세 번 다 함께 외치고 기도한다. 이러한 형식은, 찬양을 통한 분위기의 고조, 그리고 그 흥분이 유지되어, 매우 요란한 형태의 기도를 만들어낸다. 곳곳에서 방언을 외치고, 울부짖으며, 소리를 지르며 기도한다. 이렇게, 기도로 시작한 찬양은 기도로 끝나며, 일종의 수미일관성을 형성한다.

기도가 모두 끝나면, 혹은 기도 도중에라도, 각자의 자리에 모두 앉게 된다. 다음 순서로 정해져 있는, 설교시간에 대해 준비하기 위해서이다. 방금 전까지 열성적으로 찬양하던 분위기를 하나 둘 정리하고, 불이 켜지며, 자기 자신을 이성적으로 돌아보게 한다. 감성적으로 찬양했던 것이 아니라고 개인들에게 주입하는 것이다.

설교가 시작하기 전에는 보통 찬양을 한 곡 더 한다. 방금 전까지 하던 것에서, 그 찬양의 열기를 연결성 구조 속으로 가져오는 것이다. 그러한 흥분들을, 이성적인 형태로 지속하려는 의지이다. 이러한 연결과 반복, 매주, 매년 반복되는 이벤트들은, 오랜 과거에서 흘러 나와 머나먼 미래까지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설교의 내용은 그리 복잡하지 않다. 각자가 일상에서 살아왔던 형태들, 경험들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해석해준다. 일상 속에서도 예배에서 했던 것들을 기표(혹은 상징)의 형태로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들이다. 이러한 설교내용은 각자가 메모하려 노력한다. 물론 그것을 다시 읽는 일은 그리 많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 잘 보여주려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보다는 많이 읽는다. 애석하게도, 예배에 참석하는 이들은 애초에 글 자체를 잘 읽지 않는다.

일상에 대한 질문은, 교역자에게로 가져간다. 그들의 전문분야가 아닐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에 대해 안정감(혹은 확신)을 얻으려 하는 것이다. 심적 안정을, 헌금과, 시간을 바치는 것을 통하여 구입한다.

항상 기뻐하라 - 쉬지 말고 기도하라 -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의 삼중주는, 일상으로 끊임없이 확대 재생산된다. 개개인의 일상 속에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사는 것이 아닌, 의례 속에서 확립되었던 생각으로, 그러한 사고방식으로 살아가도록 확신시켜준다. 부모에게 복종하라 - 권위에 복종하라 - 남편에게 복종하라는 말들은, 위계질서에 대한 정당화 기능을 수행하도록 탈바꿈한다. 사회 질서와, 스스로의 처지와, 현재 존재하는 수많은 부조리와 모순들에 대해서 설명(헤게모니적인)의 기능을 수행한다.

설교가 끝나갈 때쯤, 각자가 설교에 충분히 몰입하여, 이성적인 형태로 스스로의 삶의 형태에 대한 답을 충분히 얻은 것처럼 보이면, 다시 찬양이 시작된다. 설교 이전에 했던 준비찬양의 형태와 동일하지만, 매우 축약된 형태로 제시된다. 처음의 극단적인 조명(무대만 밝은)이 만들어지며, 찬양이 시작되고, 한 곡 안에서 준비찬양의 형식들이 모두 반복된다. 악기만 나오는 부분이 되면, 기도가 시작되려하고, 이것은 주여 삼창으로 시작한다.

기도 중에는 강렬한 음악이 지속되는데, 악기만 연주되거나, 때론 보컬들이 코러스만 넣는 식으로 들려온다. 반복되는 음악의 비트는 즉흥곡의 형식으로 제시되며, 몽환적인 코드들을 계속 던져준다.

이러한 기도가 점점 고조되다가, 각각의 사람들의 체력이 고갈되어 갈 때쯤이 되면, 교역자의 대표기도로 마치게 된다. 설교의 내용은 기도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설교가 마치는 때에, 그리고 각자가 돌아가는 길에도 환기된다.

교회의 각종 행사에 대한 광고(announcement 라고도 한다)동영상이 상영되고, 그 영상에서는 과거의 행사들(특히 지난 주 한주는 큰 행사가 몇 개 있었다)아름다운형태로 나타난다. 각자가 찬양하던, 기도하던 모습들이, 고성능 DSLR카메라에 의해 매우 심도가 얕은 사진으로 슬라이드쇼를 이룬다.

광고 영상이 끝나면, 재생산의 시간이 시작된다. 새로 온 사람들에 대해 환영하는 의식인데, “우리들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세상에 있는 사람들을 데려와서 우리와 함께 예배하자는 말들이다. 환영을 통해 우리라는 인식이, 새로 온 사람과 기존의 교인들 모두에게 강화된다.

교회를 각자의 사정에 의해 떠나는 사람들(유학, 군대, 여행, 단기선교 등의 이유로)에 대해 다 같이 축복의 찬양을 불러준다. 그리고 그 때는, 팀의 사람들이 모두 나가서, 사탕이 주렁주렁 매달린 목걸이를 걸어준다든지, 하트모양 스티커를 옷에(혹은 얼굴 등에) 붙여준다든지 한다. 이는 팀 사람들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것도 있다. 그리고 선물을 주는데, 주로 십자가 목걸이나 조그마한 성경책 등이다. 이는 상징물로 작용하여, 교회를 떠나 있는 순간이라도, 스스로의 정체성을 강화하는 역할로 작용하게 된다.

이러한 것들이 모두 끝나면, 마지막으로 찬양을 하나 더 하고 마친다. 이때는 어느 정도 흥겨운 것을 고르며, 다 함께 율동을 하게 된다. 이때는 영상을 통해, 잘 못하는 사람들도 따라할 수 있도록, 춤추는 사람들을 지속적으로 보여준다. 물론 영상은 어느 정도 웃음을 유발하는 목적이 있긴 하다. 율동은 매우 쉬운 편이기에, 영상에서는 각자 다른 모습을 보여줘도 하나의 모습을 이뤄낼 수 있다.

그런데 영상에서는, 딴 짓하는 사람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데, 이를 통해 그런 사람을 구별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그런 사람들이 영상을 보고 다시 율동을 따라하기 시작한다면,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영향을 주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적 강조를 통해, 새로 온 사람들도 강압적이나마 따라하게 된다. 이는 부드러운 군중심리라고 할 수 있다. 따라하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된다.

율동은 우스꽝스러운 형태이다. 열심히 하는 것이 영상에서 비춘다면, 매우 웃기게 보인다. 끝나고 다시 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예배가 끝나고 그에 대해 언급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웃기지만, 결국 웃음으로 넘길 수 있다. 웃음으로 넘기지 않으면, “너 참 은혜 안된다.”라는 말을 통해 다시 한 번 그 사람을 구별한다. 어쨌든 간에 즐거워해야 한다.

찬양은 꼭 두 번 하는데, 두 번째는 어느 정도의 변주를 취한다. 음이 한 키(key)정도 올라간다. 재밌는 것은, 노래의 음 자체가 남성과 여성의 음역대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부르기 쉬운 음인 것이다. 물론 여성에게는 약간 높은 음일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여성 보컬들은 잘부른다라는 이미지가 부여된다.

곡의 거의 끝나갈 때쯤, 즉 후렴만 반복되는 시점부터는, 율동을 멈추고 다 같이 박수치며 찬양하게 된다. 이러한 박수라는 형태 자체는 모든 찬양, 특히 어느 정도 속도가 있는 찬양에서는 부드러운 군중심리에 의해 강요된다. 곡이 모두 끝나면, 위를 향해 박수를 친다. 이는 위에 계신 하나님이라는 인식의 강화와 함께, 자신의 행동 자체가 의례의 정체성을 가진다는 것을 스스로의 을 통해 지속적으로 체화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박수마저도 사그라지고, 교역자의 마지막 기도로 공식적인 예배는 끝난다. 이 기도에서는 다시 한 번 설교의 내용들이 반복되며, 이제 세상으로 나가는참여자들을 위해서, 그들이 세상 속에서 구별지어진 자들로잘 살아갈 수 있도록 축복하는(혹은 헤게모니 주입이라고 해도 좋다) 형태를 이룬다.

기도마저도 끝나고, 무대의 조명마저도 꺼지지만, 성가대석(대학부에서는 콰이어석이라고 부른다)에만 조명이 남는다. 그들은 마지막 찬양을 부르는데, 이때는 밴드의 반주가 아닌, 오케스트라 특유의 부드러운 웅장함과 함께한다. 그리고 우리들은 그 반주를 들으며, ‘세상으로 나가는 스스로를 위해 기도한다. 이제 예배는 모두 마쳤으니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하기에, 떠나는 사람의, 유목민의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조금이나마 그 소속감을 가지고 있기 위한 기도는, 성가대석의 조명마저 꺼지는 것으로 정리되며 끝난다.

공식적인 예배가 끝난 이후, 완전히 어두워진 상태에서, 동영상이 하나 나온다. 지난 주 있었던 연례행사에 대한 동영상이다. 매년 이맘때쯤 있는 집회인데, 운동회 등과 함께, 야외에서 예배를 드린다. 동영상에서는, 아름답고 은혜로운영상만이 비추어진다. 주로 사진을 통한 슬라이드쇼를 사용하였는데, 강한 음영과 함께 fade in/out 을 통해 추억이라는 형태로 기억을 재구성한다. 운동회라는 것 자체 또한, 승부보다는 즐거움에 핵심을 둔다. 그리고 팀끼리 다 같이 밥을 먹는다. 또한 영상에서 보여주는 것도, 운동회 모습 절반, 밥 먹는 모습이 절반이다.

사진들이 모두 지나간 뒤, 당회장 목사님의 설교 내용이 나온다. 지난 주 있었던 야외예배에서의 설교내용인데, 자신들의 예배형태에 대해, “너희들은 훌륭하다.”라고 정당화해주는 역할을 다시 한 번 수행한다. 각각의 사람들은 어두운 가운데 있고, 그런 사람들에게 빛이 되어주라는 말이다. 이때는 각자의 감정을 건드리는데, 각자의 삶에 대한 너희는 결국 승리할 것이다!”라는 말을 통해, 지금의 고통에 대해 인민의 아편적으로 작용한다.

운동회를 준비하는 데는 매우 많은 노력들(특히 행정적인)이 소요되었을 것이지만, 그러한 어려움들은 결국 보답 받을 것이다.”라는 말과 함께, 동영상에서는 전혀 나타나지 않도록 만들어진다. 과거 실패했던, 혹은 노력에 보답 받지 못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다.

운동회에 대한 영상이 끝나면, 각자 대학 캠퍼스에서 예배했던 모습들에 대한 동영상이 나온다. 캠심방이라고도 하는데, 교역자가 캠퍼스에 방문해서, 그 학교에 다니는 우리 교회사람들과 함께 예배를 드리는 것이다. ‘각자의 위치에서도 너희는 예배자이다라는 인식을 강화함으로서, 각각의 삶의 자리에서 예배해야 한다는 인식을 강화한다.

동영상마저 모두 끝나면 각자 팀끼리 모여서, 그들만의 모임을 위해서 짐을 챙겨서 나간다. 보통 팀 모임의 경우는 예배당에서 하긴 하지만, 팀들마다 각자의 지정된 자리가 존재한다. 각각의 부는 예배당의 각 층과 어떤 위치를, 팀은 팀끼리, 그리고 그룹끼리 또 모이게 된다.

팀의 인원이 일단 대충 모였다고 생각하면, 팀 모임을 시작한다. 이는 기도로 시작하고, 어떤 팀의 경우는 찬양을 한 곡 하고 시작하는 때도 있다. 이 또한 예배란 의례의 연장선상으로 이해할 수 있다. - - 그룹의 위계적 구조의 강화와 함께, 팀 특유의 소속감을 강화하는 방법이다.

각각의 이데올로기이지만, 그러한 이데올로기 자체에도 위계가 존재한다. 이는 스스로에게 위치를 부여하는데, 예배당에서의 물리적 위치뿐만 아니라, 대학부라는 조직 내에서의 위계 또한 규정하게 된다. 소속감의 강조와 함께, 교회 자체의 거대하다는 측면을 개인들의 사고(의 총합)을 통해 구상화(reify)를 이루어낸다.

물론 팀에도 새로 온 사람들은 존재한다. 새로 온 사람의 경우, 이름과 기수를 강조하는데, 기수란 참여한 시기가 아닌, 나이를 직접적으로 반영한다. 일반적인 의사소통 방식으로서 서로를 유형화하는 방식 속에, 교회 자체가 어느 정도의 시간이 된 곳이라는 인식을 끼워 넣는 것이다. 교회 안에서는 나이가 매우 강조되는데, 이러한 현상 또한 교회의 시간적 정당화 측면에서 이해할 수 있다.

팀 모임이 끝나면 그룹 모임을 시작한다. 그룹모임 또한 팀 모임의 형식을, 짧게 축약된 형태로 재구성된다.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끝나며, 새로 온 사람에 대한 환영과 함께, 그룹장에 의한 성경공부를 한다. 물론, 이러한 성경공부란 것 또한 설교와 매우 흡사한 형태이며, 주제의식과 기능은 동일하다고 보아도 좋다.

그룹모임 중에는 무언가를 먹으면서 이야기하는 것이 허용된다. 일반적으로 예배 때는 음식물 섭취가 반 강제적으로피해지는 반면에, 팀 모임 때는 그저 피해지는정도이며, 그룹 모임 때는 오히려 권장되기도 한다. 공식/비공식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위계적인 구조를 강조하여, 이러한 것이 개인 속에 체화되는것이다. 이로 인하여, 개인들은 그러한 위계적 구조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며, 그에 변형을 가하려는 여러 시도들에 대하여 이단적인행동이라고 해석하게 된다.

 

여기까지가 이날 있었던 공식/비공식적인 의례의 전부이다. 물론, 집에 돌아가는 길에 같이 간다든지, 밥을 먹으러 간다든지 하는 경우는 있지만, 항상 있는(혹은 반복되는)것은 아니므로 생략해도 좋다.

이날의 예배에서 필자는, 평소에 예배를 참석하는 것과는 다르게, 스스로가 문화 연구자라는 자세로 임하였다. 평소처럼 성경책을 가지고 참여하는 것이 아닌, 예배의 현장을 메모하기 위한 메모장과 펜을 들고 임하였다. 찬양시간에 나도 함께 뛰며 그들과 하나 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옆에서 바라보며, 그들의 표정이나 목소리, 자세 등에 대해 글로서 스케치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들은 결국, 필자 스스로의 존재 구속성을 파기하려는 시도였다. 군중심리에서 빠져나오려는 시도 이상으로, 이러한 행위는 본인의 가치관과 세계관 자체를 하나하나 분해했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나의 경험과, 지적 편안함을 보두 무시해야 했다. 그렇게 해서 얻은 것은, 위의 짧은 글 하나였다.

이를 통해 했던 분석의 형태는, 열심히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1~3차적 해석이 섞여 있는상태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구분이 필요하며, 지면상의 요구나 논리적 완결성을 위하여 분석을 삭제(혹은 생략한)부분들이 많이 존재한다. 물론 아쉽지만, 오히려 삭제하는 것이 더 나았다.

말하고 싶었던 것, 혹은 그에 대한 문화적 분석은, 위의 글에서 모두 뱉어냈다. 이제 할 수 있는 것은, 적었던 사실들에 대해 퇴고하는 것이 아닌, 그저 맞춤법이나 문장 구조만 수정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내가 실토했던 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정당화 과정에 대해, 감추려고 시도하는 것에 급급하게 될 것 같다.

아무리 객관적인 자세를 취하려고 해도, 필자 자체가 개신교적 종교관과 자세를 가지고 있으며, 그로 인하여 스스로에 대한 합리화를 추구하므로, 단일한 세계관에서 벗어나는 이 글을 거부하려 들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 학기, 혹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한 이래(필자의 경우는 모태신앙, 즉 태어나면서부터였다), 혹은 교회란 곳에 대해 객관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이래로 계속 고민해왔던 것들을, 한 곳에 모두 정리해 놓았다. 물론 이정도로는 만족스럽지 않고, 더 많이 말할 자신감도 있다. 하지만, 가장 적당한분량과 분석의 완결성을 위해서, 여기서 마친다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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