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학개론'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1.07.08 사회학개론 에세이
  2. 2011.07.06 Why christianity strong in Korea?
 삶에서는 많은 선택들을 하며 살아간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커피를 한잔 마시면서 쓸까 아니면 그냥 쓰다가 졸리면 잘까 하면서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선택의 순간은 언제나 다가온다. 그 상황에서 선택의 기준은, 언제나 자신의 사고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혹자는 말한다. 인간은 자유 의지를 지니고 있으며, 순수한 의미로서의 자유의지는 절대로 침범당하지 않는다고. 틀렸다. 나는 그 말이 틀렸다고 말하고 싶다. 인간은 분명히 사회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심지어 무인도에 떨어져 있는 순간에도, 사회의 영향력은 분명히 존재한다. 만약 그대가 무인도에 떨어진다면, 무엇을 먼저 하겠는가? 필자라면 먼저 도구를 만들 것이다. 하지만 도구가 없는 곳에서의 인간(이것을 인간이라고 가정한다면)이라면 무엇을 하겠는가? 또한, 과연 그것에 대한 생각을 ‘어떤 언어로’ 하겠는가? 이것이 바로 사회의 영향력이다. 이렇듯, 개인은 분명히 사회의 영향력을 받으며 살아간다. 

 그렇다면, 사회 안에서 주어지는 선택의 경로만을 따라가는 것 말고는 길이 없는가? 사실, 그렇긴 하다. 하지만, 사회가 우리에게 허락하는 경로는, 엄청나게 많다. 정말 이것도 해도 되나 싶을 정도로 비상식적이고 비합리적이 것마저 사회는 우리에게 허락한다. 군중심리? 다른 사람이 아무도 선택하지 않는 길인데 선택해도 되느냐고? 그렇다면 그대가 ‘허락’하는 1인이 되면 그것을 따라오는 이는 많다. 여담이지만, 불행하게도 필자는 ‘허락’받는 2인자의 길을 걷고 있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내 인생에서 가장 큰 선택을 한 일이라면, 아마 고등학교 1학년 때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겠다. 고등학교란 정말 특이한 공간이었다. 그전까지 이루어지던 수많은 인간관계와는 다른, 정말 ‘인간적인’ 관계가 이루어지는 첫 번째 공간이었다.

 하지만, 난 그 곳에서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갑자기 고등학교라는 넓은 세상으로 내어 쫓긴 나였다. 그러한 고등학교 생활에서, 어쩌면 길을 잃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이 동아리였다. 운 좋게도, 알고 지내던 형이 ‘에클레시아’ 라는 기독교 동아리에 있어서 그 곳으로 가게 되었다. 그렇게 나는 고등학교 생활을 시작했다.

 그 때, 날 이끌어 준 것이 우리 ‘기독동아리 연합’ 이라는 소속감 이었을지도 모른다. 학교라는 공식적인 집단 안에서, 그러한 소속감은 나의 길이 흔들리지 않도록 잡아 주었다. 나 자신만의 틀 안에서만 살아가던 나를, 새로운 세상으로 이끌어 내었던 것이다. 

 에클레시아 안에서 나는 영상(미디어)팀에 있었다. 사진과 영상의 촬영에서부터, 편집까지를 담당했다. 예배 때 카메라를 잡고 있는 것은 거의 다 우리였다. 지치고 힘들 때도 많았고, 그만 내려놓고 싶었던 적은 셀 수도 없었다. 성적이 떨어진다고 욕을 먹은 적도 있었고, 다칠 뻔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 시간들을 후회하지 않는다. 그 안에서, 나는 성장했다. 정신적인 것뿐만 아니라, 생각의 크기와 신앙심까지, 얻은 것이 더 많았다. 

 그리고 두 번째 큰 선택은, 역시 고등학교 시절이었지만, 몇 년 여간 이루어졌다. 그것은 바로 독서. 정말 우연하게 들은 것이지만, 누군가에게 “현재에 충실해라” 라는 말을 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가장 좋은 방법으로 독서를 추천했다. 그 때부터 나는 독서를 취미로 삼았다. 그냥 공부가 하기 싫었던 것도 있지만, 무언가를 읽고 있다는 그 사실이 너무나 좋았다.

 그렇게 읽은 책이 일주일에 한권 정도. 그것도 고등학생 수준의 책이 아닌, 대학에서 교재로 쓰이는 책들이었다(물론 그 책들이 교재로 쓰인다는 사실은 대학에 와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읽은 책이 고등학교 2, 3학년 시절동안 약 80여권. 순수하게 재미로 읽었던 가벼운 책(판타지, 현대소설 등)을 합하면 약 4~5백 권 정도 될 것이다.

 여담이지만, 고3 시절에는 공부를 제외한 거의 모든 것을 열심을 다해서 했던 것 같다. 디데이 100일부터 보았던 영화가 약 70편에, 드라마가 약 20시즌 정도를 보았으니... 지금에 와서야 그것이 배경 지식이 되어서, 대화를 하거나 글을 쓸 때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되지만, 당시 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나를 ‘이상한 놈’ 으로 보았다. 상식적으로, 수능을 준비하는 고3 학생이라면 문제집을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물론, 정말 그 해의 내 수능 점수는 ‘평소처럼’ 나왔다. 당시의 내 기준으로 본다면 그리 나쁜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건 아니다 싶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길은 ‘재수’였다. 우리 때의 수능이 그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08학번의 수능이었다. 나와 같은 재수의 길을 선택했던 많은 사람들이 있었지만, 나의 경우는 조금 특이했다. 나는 그 곳에서도, 꿈을 좇고 있었다. 나의 꿈 또한 조금 특이했다.

 나는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이 글이라서 쓰는 가식적인 말이 아니다. 난 진짜로 사회학이 하고 싶었다. 사회학의 길을 선택한 경로조차도 그리 평범하진 않았다. 사회학을 처음 생각했던 때는, 하나님(필자는 개신교도이다)을 처음 만났을 때였다. 주님을 처음 만났던 것은 고1 여름 수련회 때였다. 중 3때까지는 안티크리스천에 무신론자였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얼결에 지원하게 된 기독동아리에서 큰 이질감을 느꼈다. ‘내가 존재조차 인정하지 못하는 자에게 이렇게 열심히 기도할 수 있나?’ 라는 생각이 머리를 사로잡고 있었다.

 그런데 그 해 여름 수련회 때 저녁 부흥회 시간에, 저는 정말 우연히 맨 앞자리에 앉게 되었다. 이질감은 더 심해졌다. 그리고 그 때 ‘나도 한번 따라 해 보자’라고 생각했고, 주님을 만났다. 처음 든 생각은 무엇보다도, 그 감격을 누릴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한 안타까움이었다. 게다가 믿을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고 죽어가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 그들이 생각났다. 중국(그 수련회의 주제였다)과 아프리카. 그 곳에서 베토벤이, 셰익스피어가, 칸트가, 단지 그 곳에 태어났단 이유로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수많은 가능성들을 그냥 내버려 두고 싶지 않았다. 그 때 가진 꿈은, ‘지원해 주자’가 아닌 ‘한 번 바꾸어 보자’였다. 그때부터 사회학을 하고 싶었다. 

 결론적으로, 재수생으로서의 할 일을 정말 ‘열심히’ 했다. 사람이 하루에 잠자는 시간, 식사시간, 쉬는 시간을 빼고 남은 모든 시간을 공부에 ‘부을’ 수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 증명해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의외의 결과였다. 정말 내 하찮은 머리로는 이루어낼 수 없는 점수가 나왔다. 그 때 나는 사회학이 아닌 다른 길로 갔다. 아마 그 당시에는 내 꿈보다 돈을 더 쫓고 싶었나보다. 그렇게 해서 선택한 전공이 ‘경제학’이었다. 

 그렇게 한 학기를 공부하면서 나는 알게 되었다. 나는 정말 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는 것. 학교를 선택하던 순간에는 몰랐지만, 대학에 와서 정말 ‘넓게’ 배우면서야 알게 되었다.

 그것을 알게 해 주었던 내 인생의 가장 큰 전환점은 의외의 곳에 있었다. 고등학교 일을 도와주면서였다. 배재고등학교에서 하는 ‘아펜젤러의 두 번째 기도’ 라는 집회가 있다. 형식은 항상 바뀌지만, 그래도 매년 반복되는 ‘뮤지컬’이라는 순서가 있었다. 거기서 09년의 나는 뮤지컬을 도와주게 되었다. 

 어느 날, 동아리 OB(졸업생) 모임이라는 문자가 왔다. 그래서 나는 정말 즐거운 마음으로 고등학교에 갔다. 그래서 들은 말이 “너 뮤지컬 대본 좀 써라” 라는 말이었다. 사실, 적성에도 맞지 않던 공부에 지쳐가던 나는, 그 부탁(을 가장한 명령)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리고 대본 쓰기에서 끝나지 않고, 뮤지컬의 감독을 맡았다. 물론, 말이 감독이지 발성훈련, 호흡훈련, 연기지도, 안무 짜기, 당일 촬영과 보컬로까지 참여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일들을 하면서, 나는 내 안에 있는 가능성들을 보았다.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를 보았고, 내가 가졌던 꿈이 무엇이었는지 기억해냈다. 

 그 때 선택했던, 내 인생에서 가장 미친 짓이 될지도 모르는 선택이, 다시 한 번 수능을 보는 것이었다. 정말, 절대로 합리적인 선택이라 부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경제학을 배운 이라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비합리적인 선택이었다. 여담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필자의 경제학 성적은 C+이었다. 그런데, 정말 그때의 상황에서는 아무도 내 생각에 동조해주는 사람이 없었다.

 이제 다시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고민했던 것은 배부른 현실과 배고픈 꿈 사이의 중간점을 찾지 못해서였던 것 같다. 최소한 나의 기준에서, 사회학은 원래 전공하던 학문보다는 훨씬 ‘배고픈’ 학문이었다. 그때 내가 전공하려던 것이 경제학과 응용통계학의 복수 전공이었으니까, 아마 절대로 굶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사회학을 하겠다는 말을 할 때마다 내가 가장 먼저 듣는 말은 “그게 뭐야?”였다.

 그 때, 내가 사회학을 할 만한 용기를 가지게 해 주었던 한 사람이 있었다. 교회에서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 그 분의 전공이 사회학이었고, 그래서 난 사회학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 말했지만, 난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은 잘 가지 않는다. 어쨌든 그 분마저도 내가 다시 수능을 보겠다는 말에 그냥 ‘응원’ 만을 해 줄 수 있었을 뿐이었다. 그 걱정스러운 말투로 “그래! 너라면 잘할 거야~!” 라고 하던 얼굴을 아직도 나는 기억한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그래도 나름 잘 해냈다는 것. 그래도 재수 때만큼의 성적을 유지해내는 것은 성공했다. 물론 거기서 끝은 아니었다. 그 중요한, 학교의 선택이 남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정말 ‘좋은’ 학교를 가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야 한다고, 나는 그런 ‘전도유망한’ 학교를 가서 ‘편하게’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들을 했다. 하지만, 이 글을 처음부터 보았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나는 ‘힘들게’ 공부하는 길을 택했다. 정말 ‘열심히’ 공부를 해보고 싶어서, 나는 서강대학교에 진학했다. 더 좋아 보이는 길들이 있었다. 괜찮아 보이는 방법들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진짜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고 싶었다. 그리고 나는 이 곳 로욜라 도서관에 있고, 이 글을 쓰면서 잠을 깨려고 별의별 스트레칭을 다 하고 있고, 이 글을 어느 정도 쓰다가 엎드려서 한숨 잘 계획이다. 그 후에 잠이 깨면 기지개를 펴고 다음 수업에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가장 최근에 있었던 선택 몇 가지가 있다. 지난 2월 한 달간 했던 일들이다. 누구나 알다시피, 신입생들에게 2월은 바쁜 달이다. 학교에 입학도 하지 않았는데 학교와 집을 오가고, OT와 입학식, 신입생환영회 등을 다니며 사람들을 알아가야 할 시기였다. 그리고 난 그때, 연애를 택했다. 정말 짧은 기간 동안의 연애였지만 그래도 나는 절대 그 일을 후회하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수강신청이나, FA제도 같은 것은 혼자서도 배울 수 있었고(이건 진심이다, 어차피 학교별로 큰 차이는 없으니까) 주된 수강과목도 다른 1학년들과 겹치는 수업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나는 수강신청기간에 교회 수련회에 있었다. 나에게 교회 수련회란, 매우 소중한 일이다. 내 인생의 첫 번째 전환점이 고1때의 여름 교회 수련회 때에 있었기 때문에, 한 번 한 번의 수련회가 나에겐 매우 소중하기 때문이다. 수강신청을 하는 시간대(내 기억이 맞는다면 저녁8시부터 12시였다)또한 예배시간과 정확하게 겹쳤다. 즉, 교양과목은 한 개도 신청하지 못했다. 내가 수강신청을 했던 시간은 다음날 수강정정기간이었다. 그래서 내가 최종적으로 신청한 과목은 이렇다. 사회학개론, 사회조사방법론, 사회학사, 정치학개론, 일반심리학, 인류학개론. 다시 말하지만, 필자는 1학년이다. 위의 목록에서, 필자 혼자 1학년으로서 수업을 듣는 것이 3개정도 될 것이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것은 내가 하고 싶었던 공부라는 사실이다. 나의 인생 중, 2년의 황금기를 멀리 돌아오고 나서야 간신히 깨달을 수 있었던 사실이기에 즐겁게 행할 수 있다. 난 그렇게 믿는다.

 지금 이 글은 며칠간 쓴 것이기에 문체가 조금씩 달라질 수 있다. 이 글을 주로 쓰는 공간은 로욜라 2관 4층 노트북 사용가능 테이블이고, 그 다음으로 많이 하는 곳은 우리 집 거실 바닥이다. 그리고 지금은 학교에서 집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이다. 이 큼지막한 노트북을 꺼내는 것 자체가 속된말로 ‘쪽팔린’ 일이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지하철에서 잠이 오지 않고, 읽을 만한 책을 챙겨오지 않았다면, 글이라도 쓰고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또 한 번의 여담이지만, 사회학 한다는 놈이 이렇게 사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아서야...

 지금까지 이 글을 쓰면서 느낀 사실이지만, 정말 고등학교 이후의 나의 삶은 ‘내 멋대로 살았다’ 라고 밖에는 표현이 되지 않는다.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내가 최근에 겪었던 많은 일들을 보면 말한다, “넌 왜 이리 인생에 굴곡이 많아?” 라고들. 내가 굴곡을 원했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사회는 꿈을 좇기에는 충분히 험난한 곳이다. 그런 험난한 곳을 살아가면서, 이 정도라면 그래도 잘 산 인생이 아닐까?

 사회를 살아가면서, 사회에 속해있는 인간으로 살아가면서, 사람들이 나에게 추천하는 수많은 길들이 있다. 선택할 수는 있지만 아무도 추천하지 않는 몇 개의 길이 있다. 나는 그 중에, 한 번도 추천받지 못했던, 한 개의 길을 선택했다. 그것도 한두 번이 아닌 여러 번. 그래서 나온 결과는, 항상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가장 좋은 것이 되었다. 내가 선택하지 못한 많은 길들이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보면서 아쉬워하지 않는다. 나는 현재에 만족한다. 그렇지 못한 삶이라면, 어떤 선택을 했어도 나는 만족하지 못했을 것이다. 

 ‘가타카’ 라는 영화가 있다. 유전자로 인한 차별과, 그것을 극복하는 주인공을 그리는 영화이다. 지금도 가끔, 너무 하루하루가 힘들다 느껴지면 그 영화를 본다. 주인공은 “실패를 생각했다면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었어.” 라고 절규한다. 숨이 전혀 차지 않는 것처럼 달리다가 아무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죽을 듯이 숨을 쉰다. 심장마비에 걸려 이미 죽었어야 하는 심장으로 그 누구보다도 오래 달린다. 그리고 주인공은, 절대로 이길 수 없어 보이는 경쟁들을 하나하나 승리해 나간다. 

 과연, 실패란 무엇인가? 우리는 무엇을 실패라 규정지어야 하는가? 물론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으로서, 사회의 규범을 벗어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많은 ‘틀’ 들이 과연 우리가 지켜나가야만 하는 것인가? 막스 베버는 말했다. 우리는 우리가 만든 이성의 쇠장 iron cage 안에 갇혀 살아간다고. 난 지금 이성의 틀을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생각하는 이성의 틀을 조금만 넓히는 것이다. 실패해도 좋다. 아니, 십중팔구는 실패할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 한둘은 성공하지 않는가? 그 한두 가지의 성공이, 지금까지의 발전을 이루었지 않는가? 어느 소설가가 말했듯이, "세상에 필요 없는 건 영웅, 현자, 성자. 세상을 굴러가게 하는 건 멍청이, 얼간이, 바보" 이다.

 니체는 ‘적극적 허무주의’ 에 대하여 말했다. 이성으로 인하여 절망적인 사회에서, 시도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한 번 더 해보라 말한다. 그가 비이성적인 사람인가? 그는 단지 그 절망적인 상황을 ‘보았을’ 뿐이다. 그리고 나는 지금의 상황에서 ‘희망을 볼’ 뿐이다.

 지금의 사회는, 충분히 과거보다는 좋아진 사회이다. 충분히 열려 있는 사회이다. 충분히 원하는 꿈을 좇을 수 있는 사회이다. 과거에는 꿈을 좇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너무나 힘든 삶을 살아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위대한 업적들은 과거에 많고 많게도 쌓여 있다. 그렇다면, 지금 그것이 불가능할 이유는 무엇인가? 실패 없는 성공은 없다. 아니, 실패 그 자체가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실패했다고 다시 한 번 시도하지 않는다면, 그저 실패자일 뿐이다. 다시 한 번 시도할 때, 그는 ‘도전하는 자’ 이다. 그리고 나는, ‘도전하는 자’ 이다.
Posted by 미노하
 The main theme of my presentation is "Why christianity strong in Korea". Actually, my English skill is not enough to present my opinion or something. So I'm gonna do this presentation in Korean. I feel very sorry about this.

 아, 영어 문장은 여기가 끝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저는 영어에 매우 약합니다. 그러므로 일단 발표는 한국어로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제 발표는, 왜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강세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답변입니다. 
 정확한 이론적 측면에 대해서는 매우 방대한 신학, 종교학적 자료들이 있습니다만, 저는 제 경험적 측면과, 기독교 내부에서의 관점에 대해 간단히 소개만 하려고 합니다.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 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 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성경 어디에서 나오는 구절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권위에 복종하라, 권위는 하나님께 로서 났나니”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아,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 이라고 합니다. 즉,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제 발표는 여기까지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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