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왕자 시리즈의 세계에서는 신의 존재를 먼저 ‘참’으로 설정한다. 신은 존재하며, 그는 그의 백성과의 언약을 지키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을 계획하고 이루어 나간다. 이는 헤겔이 말한 “인간의 역사는 신이 자신의 계획을 이루어나가는 과정이다.” 로 압축된다. 
 그 행할 일을 위하여 한 사람을 선택하고 그를 처음부터 끝까지 단련시킨다. 그 과정은 고통 그 자체일 뿐이다. 집안의 장남으로서 모든 것을 누리고 있던 요셉은, 믿었던 형들의 배신으로 인해 노예로 전락한다. 거기서도 그나마 잘 할 수 있었던 일은 있었지만 어처구니없는 누명으로 인해 감옥생활을 할 뿐이었다. 
 아무 것도 희망할 수 없는 절망의 나락이었다. 그 상황에서 요셉은 “당신은 나보다 더 많이 알고 있습니다. 나의 길을 이끄소서.” 이는 욥이 했던 고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주께서는 무소불능하시며 무슨 경영이든지 못 이루실 것이 없는 줄 아오니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내가 스스로 깨달을 수 없는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 없고 헤라이기 어려운 말을 말하였나이다. 욥42:2~3]
 이집트 왕자에서의 신은 ‘모든 길을 내게 맡기라’ 라고 명령하고, 그에 따랐을 때 기적은 일어났다. (여담이지만, 이집트왕자 1 에서는 순종하여 지팡이를 들었을 때 바다를 갈랐다) 그렇게 신 앞에 선 인간으로서 신의 절대성을 인정하고 그의 길을 따랐을 때 회복은 일어났다. 그렇게 그는 자기 자신을 사랑할 수 있었고, 그 사랑으로 자신의 형들마저 용서할 수 있었다.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 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요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 을 준다는 것, 즉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 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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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예배하라고 명령받은 것조차 우리를 위한 것? 너무 실존주의에 찌든 사상 아닌가? 왜 인간의 철학으로 신학을 분석해야 하는가? 게다가, 정말로 실존주의가 발전된 철학이라 할 수 있는가? 단순히 현대철학의 한 조류에 불과하지 않는가? 무조건 최근의 것이 좋은 것이라고는 할 수 없잖은가. 예배하라는 명령은, 애초에 우리의 창조 목적이다. 다른 것이라면 몰라도 이것 하나는 확실하다. 자유의지의 이유는 분명하다. 우리 스스로 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단지 오래 참음으로 기다리고 계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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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 이 말은 귀족의 존재 기반을 제거하였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에서 이 말은, 단순한 좌파의 철학에 불과하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면 어떠한가? 현재도 동일하다. 한국의 보수주의 사상은 현재의 지배 계층을 옹호(혹은 정당화)한다. 좌파의 분배론은 귀족 계층(이라 부르고 '계급'이라 읽는다)에 대한 공격이다. 분배? 이미 분배라는 말 자체가 길을 잃어, 스스로의 기득권을 강화하는 수단에 불과하게 됐다. 좌파정권은 목적을 상실하였다. 게다가 시민단체마저 합법적으로 불법화 당하였으나, 좌파의 무능으로 인한 정치력 부족으로 대항조차 불가능하다. 게다가 이들은 혼란을 추구하는 것으로밖에는 비춰지지 않는다. 물론 보수주의 언론들의 작품이기는 하지만.

 아무것도 알지 못하지만 행복한 자 or 충분히 계몽되었지만 불행한 자.
 차라리 배부른 돼지가 낫지 않을까...
 하지만 내가 선택한 길은, 불만족스러운 비평가. 이러한 배고픔을 타인도 느끼게 하려는 단순한 심술. 나는 단지, 세상에 ‘고통’을 전파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식은... 고통을 동반하는 마약이며, 바이러스이다,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항상 쓰게 비웃어주고는 있지만, 가장 큰 적은, 가장 무지한 자는, 역시 나 자신. 더 이상 스스로를 변화시킬 수 없어 멍청하고 단단하게 굳어져 버렸다. 이미, 계몽의 시대는 오래 전에 끝났다. 가치가 측정되지 않는 것은 버려진다. 계몽의 가치는 도박이다. 도박은, 법적으로 금지되었다. 우리 계몽주의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비도덕적이다. 물론, 비공식적으로.
 
 그래도 멈출 수 없는 것은,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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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가 되어 버리는 삶.
하지만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고, 그 안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하여, 그는 절대자의 지배를 벗어난다.
그리고 스스로 시련의 길, 불확실한 길을 택한다.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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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스타트렉의 시작은 우주선이다. 아니, 우주 공간이다. 인류에게 주어진 마지막 미개척지, 우주. 그 곳에서 그들은 인간이 아닌 존재들을 맞이한다. 스타트렉은 언제나 그렇듯이 매우 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다. 에너지-물질의 변환이 매우 자유롭게 이루어지기 때문에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로 자유롭게 우주 공간을 넘나든다. 물질의 변환도 쉬워서 돌맹이만 가지고도 식량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스타트렉의 세계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금 다르다.
 처음부터 이들은 적과 조우한다. 미지의 적이며, 엄청난 위압감을 느끼게 하는 적이다. 배가 인간이라면, 적은 인간을 삼키는 짐승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절대적인 화력으로 자신들을 압도하면서 상대가 누군지에 대한 힌트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이건 뭐 거의 ‘하늘’ 같은 존재이다. 대항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미지의 적에 대한 공포, 타자에 대한 공포가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그렇게 처음에 등장한 우주선 ‘U. S. S. 캘빈’ 호는 자폭을 선택한다. 하지만 그렇게 모두가 죽어가는 순간에도, 한 생명이 태어난다. 죽음과 삶의 묘한 병치, 또한 아버지의 죽음을 먹고 태어나는 아들. 그리고 그는 어머니의 아버지(외할아버지) 이름 - 제임스 - 을 가지게 된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제임스와 스팍 이렇게 둘로 축소될 수 있다. 제임스(영화상에서는 주로 커크라고 한다)는 문제아이다. 적성 검사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기는 했지만 스스로 그것을 활용하려 하지 않는다. 다음으로 ‘스팍’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그는 처음부터 엘리트로 키워지며 모두가 인정해주는 천재이다. 이는 숙명적인 라이벌의 이미지로 등장하기도 한다. 초반의 영상 기법 상으로도 이들은 대조적인 모습을 많이 보인다. 매우 감정적이고 즉흥적인 커크와 정 반대의 지적 능력 위주인 스팍.
 그들은 계속 충돌한다. 물과 기름처럼 절대로 섞일 수 없는 성격을 가진 그들이다. 커크의 도전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은 스팍의 논리적이고 이성적인 모습과 상극이다. 하지만 그런 스팍도 무너진다. 그의 별이 멸망하고, 그의 어머니가 죽는다. 그의 어머니가 죽은 후의 장면에서는 오히려 부감(로우 앵글)을 활용하여 그의 무기력감을 강조한다(여담이지만, 이는 ‘시민 케인’에서 이미 써먹은 기법이다).
 그런데 그의 행성이 멸망할 때, 그 행성에 블랙홀이 생기기 때문에 멸망한다고 표현하였다. 그리고 그 장면은 필자로 하여금, 한때 유튜브에 떠돌았던 영상을 떠올리게 했다. LHC(강입자 가속기)로 인한 지구의 멸망 루머. LHC로 인해 지구에 블랙홀이 생기고, 그로 인해 지구가 멸망한다는 루머가 있었다. 그리고 그 때 떠돌았던 영상과 영화의 장면은 매우 흡사했다. 나는 그 순간 이 단어가 생각났다, 디스토피아. 이번 스타트렉은 디스토피아였다. 영화의 진행 내내 기울어진 카메라 앵글(위아래가 아니라 수평이 아예 맞지 않았다)을 강조했다. 이를 통해 미래가 가진 불안감과 위험성을 끝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신화에 대한 계몽의 도구로서 과학을 택했으나 과학 그 자체가 신화가 되어버린 세계. 과학이 더 이상 우리 편이 아닌, 적으로서의 타자가 되어버린 세계였다. 어쩌면 이것은 최근 헐리웃 SF/판타지 영화의 추세인지도 모르겠다. 그 대표적인 예가 ‘다크나이트’ 이다.
 하지만 절대로 이 영화는 절망으로 끝나지 않는다. 커크, 그는 불가능에 도전한다. 작은 것으로 큰 것에 덤빈다. 결국 다시 한 번 실존주의이다. “논리는 접어두고,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라며 끝까지 과학에 대한 인간의 승리, 혹은 실존주의적 명제를 고수한다. 거대한 사회와 도전하는 개인. 이건 뭐 거의 ‘원더풀데이즈’ 나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 를 보는 것 같다. 우주선을 타고 날아가는 구도도 그렇고 도전하는 대상의 위압감도 비슷하다. 게다가 결론마저 비슷하다. 그들은 결국 승리해야 한다. 그리고 승리한다.
 그렇기 때문에 숙적의 대사는 처절하다. 주인공 일행은 적에게 대하여 “항복하면 살려주겠다.” 라고 한다. 하지만 그는 받아들이지 않고 “고통 속에 죽겠다.” 라고 말한다. 이것을 영웅이 말하면, 보통 다른 영화에서 “지옥에서 보자.” 정도의 박력이 있는 말이어야 한다. 또한 그 후에 무언가 기적이 일어나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것이 영웅이 받는 특혜이다. 하지만 그는 영웅이 아니었고, 그는 그냥 죽고 만다.
 여기서 우주선의 모양은 대부분의 경우 원의 모양을 취한다. 원은 하나의 세계이다. 즉, 배하나 만으로 하나의 세계를 구성한다는 뜻이다. 또한 원으로서 빛의 이미지를 전한다. 둥글게 퍼지는 빛, 우주의 어두운 곳에 대한 빛으로서, 계몽의 사자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런데 적의 우주선이 가진 형태는 매우 기괴하다.
 그들은 결국 다시 지구로 돌아오며, 메달을 보상으로 받는다. 또한 커크에게는 엔터프라이즈호가 보상으로 주어진다. 이것은 영웅이 받는 보상이다. 하지만 마지막에는 다르다. 그들은 떠난다. 서부극에서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브리튼의 영웅들이 그러하듯이. 그들은 또 다른 모험을 위하여 떠난다. 사막의 끝에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가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을 위하여 다시 한 번 떠난다. 미지의 세계를 향해. 이제, 모험의 시작(비기닝)이다.
 
Posted by 미노하



Here, I Am.
나는 여기에 (살아)있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거 한 마디면 정리가 가능한 철학. 엄청나게 좁은 우리의 인지적 한계에 대해, 매우 희망적인 메시지를 던져 준다. 일단 우리는 살아 있다. 우리는 살아 있는 생명이다.
 
하지만, 이 철학은 '모든 인간은 죽는다'라는 절망적인 가정으로부터 출발한다.
 
어차피 모든 인간은 죽는다. 어차피 죽는다. 그렇다면, 일단 살고 보자. 일단, 도전하자. 어차피 죽을 것이라면, 나는 도전하고 죽겠다. 불가능이라고? 그딴 거 몰라. 일단 도전하고 보자.
 
"이 더러운 운명에, 나 스스로를 던진다!"
 
...까지가 이 철학ㅡ이라기보다는 윤리ㅡ의 명령이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인은 다르다. 사고 과정은 같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가지 더 큰 확신이 있다. 우리는, 구원받았다. 어찌 되었든, 우리는 구원 받은 존재들이다.
 
그렇기에, 우리 기독교인들은, 실존주의자들보다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도전할 수 있어야 한다. 정말로 '불가능에 도전하는' 자들은, 바로 우리들이 되어야 한다.
 
게다가, 한가지만 더 묻자. 정말 불가능한가? 1:60억 의 대결일 뿐인가?
 
아니다! 2:60억 이다!
 
그 '1' 이 더해진 것은 절대로 평범한 '1' 이 아니다. 정말, 말 그대로 전능한 '1' 이 더해진 것이다. 알파와 오메가이며, 만물의 창조자이자 주관자가 되시는 '1' 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확신. 이는 실존주의의 그 절망적인 확신 따위에는 비교도 안되는 진리이다.
 
그러한 우리가, 대체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가? 세상은 우리의 아래 있다.
 
도전하자! 우리에게는 주님이 함께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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