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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0 잉여에게 희망을

잉여가 뭐라고 생각해요? 다들 잉여라고 그러면 뭔가 부정적인 생각부터 가지잖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저도 그렇게 보거든요. 잉여라는 말은 나머지라는 말과 동의어에요. 혹은 잉여라는 말을 순화하면 나머지라는 말이 되죠. 그런데 다들 알다시피, 나머지 공부, 수치스러운 일이잖아요? 잉여 학점, 남들 다 가져가고 남은 학점을 내가 챙긴다, 부끄럽잖아요?

오래 전에 저희 집 책장에는 잉여인간이라는 책이 있었어요. 어두운 책 표지에, ‘남겨진인간에 대한 내용일 것이란 막연한 두려움때문에 펴보지 못했던 책이죠. 사회에서 잉여가 된다... 그것은 분명히, 경계의 대상이 될 수밖에는 없어요. 생각해봐요, 누가 여러분을 잉여라고 부른다면 기분 좋겠어요? 두려움의 대상인 잉여인데, 그 화살이 나에게로 향한다면, 그것은 분명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킬 거예요. 두려움도 반복되면 불쾌감이 되는 법이니까요.

서강대 사회학과에는 잉여라는 이름의 학회가 있어요. 학회의 목적은, 잉여라는 언어에 드러난 현대 사회의 문화 코드, 그리고 사회문화적 의미론의 분석이에요. 특히 요즘 그 학회에서는 잉여니스의 현상학이라는 주제로, 잉여라는 의미가 생산되고(혹은 외재화externalize) 다시 인식(혹은 내재화internalize)되는 과정에 대해 연구하고 있어요. 잉여라는 말 자체가, 현대 사회의 많은 모습들을 담고 있을 것이라는 신뢰와 함께, 잉여라는 언어 자체의 의미가 재생산되는 과정에 대한 현상학적 연구를 통해 현대 사회의 모습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것이죠.

이렇듯, 잉여는 현재 한국 사회의 문화 코드중 하나라고 할 수 있어요. 혹은 이러한 문화가 주로 확산되는 곳인 인터넷 공간의 문화 코드라고도 할 수 있죠. 인터넷 공간의 주된 향유자를 청년층으로 좁힌다면, 잉여는 청년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문화를 반영한다고 거칠게나마표현할 수 있겠죠.

이들은 자기 스스로를 잉여로 칭하며, 스스로의 행동을 비웃어버리죠. 서로의 의미 없는(그것이 고의적으로 의미 없을지라도, 심지어 그것이 의미 있는 행동일지라도) 행동에 대하여 잉여짓이라고 칭하며 스스로들의 행동에 대해 쓴웃음을 짓는 거예요. 스스로의 사회경제적 위치가 잉여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워하면서도, 오히려 서로에게 잉여라고 부르는 것을 별로 거리끼지 않아요. 누군가 나에게 잉여라 칭하는 것을 기분나빠하면서 동시에, “그래 나는 잉여니까라는 자학적인 말을 덧붙여 버리죠. 청년 세대 자체가 스스로를 잉여라고 낙인찍어버리고 있는 상황이에요.

근데 왜 기분이 나쁠까요? 왜 잉여라는 말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야할까요? 그건, 잉여란 말 자체가 쓸모없는 것이라는 가치판단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 일거에요. 그렇다면, 이런 잉여란 무엇이며, 이들이 한국 문화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무엇일까요? 먼저 잉여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사전적 정의를 통해서 알아볼게요.

 

 

잉여(剩餘)[ː-]

명사

1쓰고 난 후 남은 것. ‘나머지로 순화. 여잉(餘剩).

2」『수학나머지4의 전 용어.

 

 

일단 사전적 정의를 가져오기는 했는데,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의미를 구체화시키기 보다는 더 멀게만 느껴지게 만들었네요. 그래서 여기에 좀 더 설명을 덧붙여볼게요. 2번의 정의는 그리 중요하지 않으니 1번만 설명해 보자면, 가장 먼저 남은 것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와요. , 이미 잉여가 아닌 것들을 통해 일처리를 다 했으니, 잉여는 일처리를 위해 필요하지 않은 것이 되는 것이죠. , 쓸모없는 존재가 되죠. 잉여가 아닌 것들은 이미 어떠한 위치가 부여됨으로서 사회 내에서, 특정한 쓸모를 담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잉여는 어떠한 위치가 부여되지 않아요. 사회, 조금 작게 표현해서 일처리를 수행하는 데에 어떠한 가치도 지닐 수 없는 것이 잉여라는 뜻이죠.

이렇듯, 사회는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기 위해서 잉여를 만들어내죠. 대리석으로 조각을 한다고 생각해봐요. 끌과 정을 통해서, 대리석은 특정한 모습을 조금씩 갖추어나가죠. 그렇게 하나의 조각이 완성됩니다. 어떤 완결된 구조를 지닌 하나의 조각이 말이죠. 역으로 생각해보면, 그러한 완성된조각이 있기 위해서는 깎아 낸 나머지 조각이 존재해야 합니다. 이러한 나머지 조각은 재활용이 불가능해요. , 나머지는 쓰레기가 됩니다.

자본주의도 마찬가지입니다. 경제가 호황기일 때도 결국 실업자는 존재합니다. 이는 완전고용 실업률, 혹은 자연실업률이라고 하죠. 경제활동인구의 3%정도만이 실업인 상태를 보통 완전고용상태라고 부릅니다. 아무리 경제가 호황이 되어도, 이들은 결국 실업상태를 유지할 수밖에는 없어요. 구조적인 문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기술이 발달하는 상황에서 더 심해집니다. 최근(이라기엔 꽤 지났지만) 등장하기 시작한 ‘20:80의 사회복지라는 논의들에서 잘 볼 수 있죠. 20%만이 사회를 유지시키는 데에 쓸모 있는 사람들이고, 나머지는 그들을 보조하는역할만을 수행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구조는, 매우 안정적인형태로 스스로를 유지합니다. 여기서 80%는 잉여가 아니라, 사회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필수적인인력입니다.

오히려, 이러한 구조 속으로 편입되려 하지 않고, 스스로를 백수의 상태로 내버려두며, ‘잉여라는 말로서 자신의 가치를 규정하는 사람들이 잉여가 됩니다. 청년기의 상태, 특히 대학생이라는 기간은, 사회로 나가기 직전에 거치는 일종의 모라토리움상태에요. 청소년기의 연장으로서 존재하는 이러한 유예기간은, 이미 독립했어야 하는 나이에, 스스로의 정체성을 여전히 학생으로 규정하여, 20에도 80에도 속하지 않는 존재가 되는 것이죠. 이들은 교육이라는 이름으로서 복지의 대상이 되며, 사회에서 쓸모를 가지기 위한, 일종의 통과 의례적 시간에 속하게 됩니다.

여기서 잠시 구조주의의 논의를 직접 가져와볼게요. 사실 지금까지 했던 분석의 형태는 대부분 구조주의적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제는 좀 더 구체적인 형태가 필요하니까요. 구조주의란 세상을 이분법적 방법으로 해석하는 개인의 사고방식을 말합니다. 모든 개인에게는 이러한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하려는 일종의 내재적인(혹은 선천적인)’ 의지가 있고, 그러한 해석을 통해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를 보는 관점을 만들죠. 또한 만들어야 하고요. 그리고 여기에 실존주의 논의를 살짝 더한다면, 구조주의적 세계관은 세상을 내 편너희 편으로 나누는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죠. , 모든 것을 주체와 타자로 나누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하는 것들은, 위험한 것이 되어 피해야 할 것으로 분류됩니다. 기독교의 성경, 특히 레위기 부분에서,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나누는 부분에서 이러한 것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기존의 세계관으로 분류가 가능한 것, 즉 명백한 것은 먹을 수 있는 동물이지만, 어중간한 위치에 있는 존재는 부정하며 먹을 수 없는 존재이고, 또한 피해야 할 존재가 됩니다. 동양이든 서양이든, 대부분의 전통에서 무서운 대상(혹은 경외의 대상)들은 보통 이런 중간자적 존재로 나타납니다. 대표적인 예로, 귀신을 볼까요? 이들은 이승에도 저승에도 속하지 못하는 자들이에요. 미노타우르스는 인간과 소의 하이브리드고 말이죠. 이러한 중간자적 존재들은 배척당하거나 두려움의 대상이 됩니다. 세계관을 불안하게 만드는 존재들이니까요.

이러한 분석법으로, 대부분의 신화를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구조주의의 가장 큰 장점이자 동시에 단점이 되는데요, 구조주의는 Theory of Everything 이기 때문에 동시에 Theory of Nothing 도 될 수 있죠. 하지만 일단 분석의 도구로서 매우 유용하기 때문에 자주 쓰이며, 그만큼 많이 비판받게 되죠. 이러한 구조주의적 분석은 신화에 대한 분석을 뛰어넘어, 최근 영화에 대한 분석의 도구로써도 많이 사용됩니다.

 

 

영화는 끊임없이 주체와 타자 사이의 갈등을 표현하고 있어. 당연히 주체는 인간이었지. 그런데 정작 관심과 시선은 타자를 향하고 있어. 저항하는 주체가 아닌, 억압받는 타자가 주인공인 거지.

아 먼저, 주체란 나 혹은 우리를 뜻하고, 타자는 , 너희, , 그들등을 의미해.

그런데 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닌 다른 이들을 타자로 분류해 버릴까?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역시나 첫 번째 이유는 다르다라는 거야. 그 다름 이라는 것이 주체를 두렵게 만들기 때문이겠지. 그러한 두려움은 인간의 자기 보호 본능을 자극하지. 그 본능은 자신을 두렵게 하는 것을 제거하려는 욕구를 지니게 만들어. , 공격해야 한다고 느끼는 거지. 그 공격의 방식은 정말 많고 많은데, 그 중 하나가 이 위에 설명한 격리. ‘아파르트헤이트라는 말에는 격리라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어. 이로써, 주체와 타자는 극명하게 나뉘고 주체는 다시 안심하게 되지.

영화는 여기서 다시 만약?’ 이라는 잣대를 들이대. 바로 주체와 타자의 경계를 허무는 자야. 이건 뭐 거의 에반게리온에서 롱귀누스의 창같은 존재야. 가장 강하지만, 가장 약한 존재. 그런데 그는 경외의 대상이 되지 못해. 이카로스의 욕심에 묻혀버리지. 여기서 모큐멘터리의 아이러니는 빛을 발하지. 두려울 정도로 잔인하고 악한인간으로서의 주체와, 정말 인간적이고 선한 외계인들. 이것을 다큐멘터리의 시선을 빌려 매우 강한 설득력으로 뇌리에 심어놓지. 영화는, 타자의 외침을 끊임없이 전달해. “살려줘!”

하지만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입장을 생각해 봐야 해.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넘어갔겠지만, 주체들도 외치고 있어, “살려줘!” 라고. , 네가 2차 대전의 전장에 군인으로서 있다면 어쩔 거야? 일단 살기 위해 쏘겠지. 그들도 똑같아. 살기 위해 타자를 억압하고, 죽이고, 실험하지. 그것이 좀 더라는 말이 생략될 수 없기에 천인공노할 짓거리가 되겠지만. 뭐 그럼 어때, 타자는 실존하는 존재가 아닌걸. 타자는 단지 타자로서 존재할 뿐이야. 스타에서 미네랄 캐면서 죄의식 느껴본 적 있어? 가깝게, 개미나 파리 잡을 때 죄의식 느껴? 만약 네가 불교 신자가 아니라면 느끼기 힘들 거야. 그것이 바로 주체야.

그런데 그렇게 든든한주체와 객체의 벽을 허무는 자가 바로 주인공이었던 거지. 하이브리드.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하이브리드. 너무나 바보 같고 착하고 정말 인간적인 욕심밖에 지니지 않았던 하이브리드.

 

 

다시 경제논리로 돌아와서, 20의 위치이든 80의 위치이든 결국 일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청년기의 사람들, 혹은 백수들은, 그 어떤 위치에도 속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자발적이든 타의든 중요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그들이 이라는 일종의 의례에서 벗어나 있다는 사실입니다. 일하고 월급을 받는 것, 그러한 삶의 반복은 의례의 기능을 수행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모두 일하고 있다는 그런 일종의 동시성에 대한 믿음은, 일하고 있는 사람들끼리의 집합적인 주체의식을 만들어내죠. 그리고 2080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청년들은, ‘잉여가 되어, 일종의 위협으로서 존재하게 됩니다. 위협이라는 용어가 뭔가 탐탁지 않다면, ‘불만거리라는 용어도 괜찮을 것 같군요.

구조 안에 편입되어, 스스로의 위치를 규정하여 자신의 행위에 대한 정당화가 충분히 이루어진 사람들에게 있어서, 이러한 잉여들은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하는 자들입니다. 이러한 관점은, 최근 트위터에서 있었던 세대 갈등의 형태에서 잘 볼 수 있었습니다.

이는 가히 영웅주의적 꾸중의 이중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금의 40, 즉 과거 민주화와 산업화를 동시에 이뤄냈던 영웅들에게 있어서, 지금의 잉여세대라는 자들은, 영 못마땅하게만 보이겠죠. 그들이 보기에, 지금의 사회가 가진 모순은 너무나 뚜렷하게 보이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청년들이, ‘불만거리로 작용하게 됩니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청년기란 성인이 되기 이전의 유예기입니다. , 성인들이 가질 수 없는 정치적 관념을 실천에 옮김으로써, 현실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생각을 부여할만한시기가 되는 법이죠. 이것은 전후 독일의, 낭만주의적 세대 관념, 우리 사회를 긍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나갈 젊은이들을 잘 기르자.”라는 주장과 전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까지의 논의는 전부 잉여라는 것이 사회 내에서 만들어지는방식에 대한 구조주의적 서술이었습니다. 이는 사회에서의 집단의례(혹은 집합의식)을 통한 구별짓기에 불과합니다. 잉여라는 구분법조차 결국 개개인들이 외재화시킨 관념인데, 이것을 개인들이 객관화시키면서, 스스로가 잉여가 되는 것을 받아들여야 하는숙명적인 것으로만 보이게 만듭니다. 하지만, 여기까지의 논의는, 반쪽짜리에 불과합니다. 과연 그러한 구조라는 것이, 태초부터 존재하던 것일까요? 모든 개인에게는 원래 잉여라는 관념이 존재했을까요? 이에 대해서, 정 반대 방향의 분석을 해볼게요.

한 번 물어봅시다. 게임 좋아하세요? 아니면 뭐 취미 같은 것을 생각해볼게요. 취미활동 그거, 왜 하세요? 자기 계발? 그거 하면 뭐 돈 들어오나요? 뭐 그런 것들을 목표로 해서 취미생활을 하시는 분도 있겠죠. 그런데 생각해 봅시다. 저는 사진을 찍습니다. 뭐 글 쓰는 것도 취미로 하구요. 저는 이런 활동들을 왜 할까요?

네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미묘하게 다르긴 하지만, 대체적으로는 동일합니다. 게임 왜 하냐고요? 재밌으니까요. 사진? 글쓰기? 학회? , 재밌으니까 합니다. 잉여도 동일합니다. 잉여라는 어감 자체는 나쁘지 않습니다. 하지만, 살짝만 말을 바꾸면 잉여는 쓰레기가 됩니다. 잉여짓은, 아무리 잘 봐줘도 헛짓거리이상으로 나아가기 힘들다고 말하죠. 주류에 편입될 여지는커녕, 그 가능성조차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 잉여죠.

실존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니체의 위버맨쉬, 영어로는 over-man 이 있죠. 실존은, 쉽게 생각하자면, 생존입니다. 즉 살아있다는 그 사실이 실존이죠. 인간이란 것 자체는 생존을 위해서 자신의 주변을 공작하게 됩니다. 인간은 그 자체로는 생존할 수 없는 단위이기 때문에, 생존을 위한 수많은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것이죠.

실존이라는 용어를 꺼낸 이유는 이렇습니다. 니체의 용어에서의 초인이란, 강한 능력을 지니고, 모든 것을 이겨내는 초월적인 존재가 아닙니다. 초인은 다만, 우리와 함께 살며, 모든 일들을 견뎌 내는사람이죠.

이런 실존의 사례는, 영화에서 가장 많이 나타납니다. 멋있거든요. 어떠한 시련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그에 맞서는 자세. ‘이라는 것으로도 나타나고 말이죠. 물론 그것은 분명 무리한 도전일 뿐이며, 성공 가능성도 존재하지 않는데다가, 실패할 것임이 분명한 길이기 때문이죠. 영화가 감동을 주는 것은, 그것이 성공하기에 그러한 것입니다.

 

 

[트루먼 쇼]라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이런 실존적인 인간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볼 수 있어요.

 

트루먼 쇼의 세계에서는 절대자가 존재한다. 트루먼 쇼의 프로그램을 창조하고, 트루먼의 모든 행동을 관찰하며, 그의 인생마저도 만들어 내는 크리스토프(에드 해리스) 가 그 절대자이다. 영화 후반부로 가면, 그는 날씨를 조정하고 태양을 뜨고 지게 하는 등, 자연 환경까지 지배하는 전지전능한모습을 보인다.

그의 행동은 마치 기독교의 신을 돌아보게 한다. “바깥세상도 다르지 않아. 같은 거짓말과 같은 속임수, 하지만 내가 만든 공간 안에서는 두려워할 필요는 없어.” 가 바로 그것이다. 성경에도 이와 같은 구절이 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14:6] 아버지께로 나아온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는 구원을 준다는 것, 나만이 너에게 구원을 줄 수 있다.” 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영화감독은 묻는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그것은 과연 행복인가? 그것이 진정 구원인가?” 여기서 당당하게 Yes 라고 대답하는 것은 무리이다. (여담이지만, 짐 캐리가 나왔던 대부분의 영화는 기독교에 대한 다른 의견들을 제시한다. 최근 예스맨에서 그러하듯이.) 모든 일상이 대중에게 방송되고, 그것이 Show 가 되어 버리는 삶이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 에덴동산에서 살아가라 말하지만, 자유는 존재하지 않는다.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계몽되지 않은 인간의 삶이다.

기독교에서는 빛으로 나아오라.” 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 모든 것을 버리고, ‘어둠을 택한다. 진정한 인간, true-man 이 되기 위하여. 배부른 돼지가 아닌, 배고픈 철학자가 되기 위하여, 그것이 인간이라고 말하는 당당함으로.

 

무한 도전이라는 예능프로그램만 봐도 나타나죠. 영화같은 데서도 이와 관련된 명대사가 많잖아요. 스타트랙의 논리는 접어두고, 마음 가는 대로 하게.” 라든지. 많은 영화(특히 최근 등장하는)들의 논리가 이렇죠, “생각하지 마, 일단 즐기는 거야!”.

어쨌든 다시 잉여 문화로 넘어오자면, 이렇습니다. 타칭 잉여라 불리는 사람들은 뭘 하고 있죠? 아무것도 안하고 가만히 명상하고 있나요? 잠만 자요? 아닐걸요? 이들의 대부분은 DC 나 트위터, 오유, 엔하위키 등의 곳에 많이 서식하고 있습니다. 그 말인즉슨, 그들은 최소한 자신들의 즐거움을 위해서 무언가 하고 있다는 뜻이죠.

저는 이것을 잉여의 본질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거 왜 해?” 라는 질문에 대해, 뭔지 모를 당당함으로 그냥!” 이라고 외칠 수 있는 그 자신감 말이죠. 스스로가 잉여라는 사실에 자괴감을 가지고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일종의 예술적 가치로서 끌어올리는 것이 이러한 잉여라는 것이죠.

 장기하에 대해서는 잘 알고 계시죠? 그렇다면, 혹시 인디 밴드 알고 있는 것 더 있나요? 그럼 한 번 더, 인디 밴드의 정의를 내려주실 분?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하는 사람? 그렇다면 서태지도 인디에 속해야 합니다. 아 물론, 저는 서태지를 인디에 포함시키는 것을 주저하지 않겠습니다. 뭐 자본력의 문제야 존재하지만, 원론적인 정의는 그것이니까요. 신해철의 경우를 볼까요? 정작 신해철... 선배님은 아니죠? 신해철은 음악 전공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냥 그게 재밌어서 하다 보니 그게 직업이 된 케이스죠. 여담이지만, 그냥 피아노로 도미솔을 쳐보고 나서 그게 뭔가 소리가 예쁘게 들려서 감동했다는 일화도 있죠. ...그래서 나온 곡이 그대에게라더군요.

다시 장기하로 돌아와서, 그가 있는 소속사는 지속 가능한 딴따라질입니다. 즉 본인이 하는 음악딴따라질이라는 말로 격하시켰죠. 하지만 그 누구고 그에 대에 뭐라 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 본인도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자랑스럽겠죠. 속된말로, 좀 비속어를 섞어서 말하자면, ‘병신 같지만 멋있어라는 말이 있죠? 그것이 바로 실존적인 행위 주체, 혹은 예술적인 잉여짓을 대하는 우리들의 태도입니다.

잉여들은 이 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을까요? 아니, 그들(혹은 잉여짓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우리들)의 존재 자체는, 지금의 사회를 향해 어떤 말을 하고 있나요? 어떤 기능을 수행하고 있습니까? 위의 영화 분석에서 사용했던 살려줘!” 라는 외침일까요? 아니면 종교집단에서와 같이 오오 믿습니다 오오오.” 라는 식으로 현재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가고 있을까요? 에이 설마.

잉여들은 스스로를 잉여라고 부르는 것에 거리낌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사회를 향해 짱돌을 던질 힘, 심지어 살려줘!”라고 외칠 힘도 없는 이들이 바로 잉여들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일상적 실천은 멈추지 않고 있습니다. 각자의 위치에서 살아가며, 공작인임과 동시에 유희적 인간의 모습을 버리지 않고 생존하고 있죠. 사회에서 아무런 가치를 지니지 못한다고 판명난 이 잉여들. 차라리 그냥 생존의 기반을 모두 빼앗겨도, 하소연할 곳이 없는 사람들이죠. 아니, 하소연할 기운도 없고, 애초에 하소연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구조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잉여입니다.

꽃들에게 희망을이라는 단편소설이 있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작은 벌레들은, 하늘을 향해 서로가 서로를 밟고 기어 올라가려고 하고 있죠. 이들이 바로 잉여입니다. 전혀 다른 길을 선택하여 훌륭한 것을 이루어 낸 나비는 잉여가 아닙니다. 그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사회에서 성공하는, 그리하여 꽃들에게 희망을 주는 엘리트인 것이죠. 진짜 잉여들은 탑을 쌓은 벌레들일 것입니다. 정 비유하자면, 꽃들을 대기업으로, 벌레들은 하늘 끝까지 올라가서 아무 것도 없음을 확인하지만, 결국 다시 그 하늘에 오르기 위해 계속 그 탑에 있는... ‘벌레들일 것입니다.

잉여 자체는 사회를 유지시키는 일종의 완충제 역할을 수행합니다. 스스로의 위치에게 부여되는 기능이 그것이죠. 하지만 이것은, 물론 지금까지 미뤄져 온 일이지만, 스스로에 위치에 대한 자각을 통해, 현실로 변혁을 이루어내는 혁명적 계급으로 작동할 수 있죠. 그렇기에 잉여는 위험한세대이며, 동시에 아직은 아무런 쓸모도 없어 보이는 벌레들에 불과하게만 보입니다.

그런 잉여들조차도, ‘구조에 대한 작은 반항을 시도합니다. 승산? 그런 말도 안 되는 것이 있어 보이나요? 그렇다면, 세상은 꿈과 희망으로 가득 차 있다고 생각하시는 분이시군요. 어차피 희망은 없어요. 그렇기 때문에 일단 하게 질러 보는 거예요. 그리고 그렇게, 잉여 자체의 사회적 기능을 잉여들 스스로가 부여하기 시작하면, 그렇게 잉여는 잉여가 아니게 될 것입니다.

 

 

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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