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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7.24 0401 보이스포럼
  2. 2011.07.05 기술의 진화, 기술과 진화

아 혹시 인류학개론 들으신 분 있나요? 그럼 말이 편해지는데.. 없나요? 그냥 제가 설명할게요. 인간에게는 무언가를 설명하고자하는 욕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볼까요? 비는 왜 옵니까? 그에 대하여 이러저러한 과학적이고 이론적인 설명을 할 수 있겠죠? 그런데 고대에는 이런 과학적인 이론들을 아마 몰랐겠죠. 그래서 뭐.. 요정이 했다거나? 뭐 그런 설명들을 했겠죠. 바로 이거에요, 설명. 힌두 신화였나? 아무튼 거기에 이런 게 있어요. 우리가 사는 세계는 거대한 거북 위에 있다고. 누가 묻죠, 그럼 그 밑에는? 그래서 대답해요, 그 밑에는 거대한 바위가 있다고. 하지만 그 밑에의 밑에의 밑에는? 모르죠. 그 때 무한의 개념이 생겨납니다. 무한히 거대한 바위 위에 작은(우리에게는 세계이지만) 거북 한 마리가 있고, 그 위에 우리들이 살고 있다고 말이죠. , 이 때 무한대라는 개념이 생겨납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창세기, 혹은 태초라는 의미의 히브리어 베레시트와 정확히 동일한 이치죠. 사실, 아직도 창조론이 창조과학이라는 미명하에 받아들여질 수 있는 논리는 이것입니다. 모든 것의 시작에는 무엇이 있었을까? 과연, 우리는 스스로 존재했던 자들인가? 그럼, 이 모든 물질들의 태초에는 과연 무엇이 있었는가? 아 여기서 원래 '이집트 왕자' 장면 가져와야하는데.. 뭐 어쨌든?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와의 만남 장면입니다. 모세는 불꽃을 향해 물었죠, 당신은 누구냐고. 기독교의 신은 말합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I am who I am” ,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을 창조하였고, 세상 모든 것의 근원이 됐다는 것이죠.

빅뱅이론을 설명해볼게요. 여기서부터는 약간의 물리학 지식이 필요합니다만.. 그냥 들으세요 뭐. 우주는 계속 커지고 있습니다. 도플러 이론 정도는 아시죠? 그 기차 같은 거 지나갈 때 슈웅 하고 소리의 주파수가 바뀌는 거. 원리는 단순해요. 관측자에게로 다가오면서 생겨나는 음파는 주파수대가 점점 높아지고, 멀어질수록 주파수대는 낮아집니다. 여기서 주파수란, 파장의 진동수를 말하는 것쯤은 다 아시죠? 이러한 주파수의 변동 현상이, 우주에 있는 별들에서도 나타나고 있어요. 일단 먼저, 빛은 파장의 성질을 가진 물질입니다. 이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그냥 넘어갈게요. 어쨌든, 대략 50년 전쯤에 관측한 별빛의 주파수와 현재 관측하는 별빛의 주파수가 다른 것이 계속 관찰되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이렇게 우주가 계속 확장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간을 거꾸로 돌려볼게요. 지금은 확장하는 우주니까, 축소하는 우주로 바꿔서요. 아주 오래 전으로 돌아가면, 그니까 우주가 전혀 확장하기 이전, 우주의 모든 물질들이 하나의 이라 말할 정도로 작은 공간 안에 있던 시절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태초에는, 우주 전체라는 엄청난 질량(혹은 에너지) 가 그런 작은 공간 안에 있었죠. 그러던 어느 날, 그 질량들의 균형이 무너지는사건이 일어나요. 그 때, 물질과 반물질이 떨어져 나가요. 그렇게 균형이 깨지며 동시에 대폭발, 즉 빅뱅이 일어납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의 방법으로 등장한 이론들에는, 유신진화론, 지적설계론, 젊은 지구 창조론 등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의 대부분은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묶일 수 있죠.

먼저 유신진화론이란 최초의 빅뱅 자체에 신의 의지가 개입하였고, 그 후의 진화의 모든 형태가 신의 뜻대로 이루어졌다고 보는 관점입니다. 이는 가톨릭교회 쪽에서 공식적으로인정하고 있으며, 그나마 가장 무난한 창조과학의 한 방법입니다. 하지만 이 이론은 그 신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 날아다니는 스파게티 괴물에 의해서도 될 수 있겠죠?

다음으로 지적설계론 이란,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너무나 정교하게 돌아가기 때문에, 어떤 특정한 설계자가 존재하였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보통 최신의 창조과학 쪽에서 주장하는 이론입니다.

마지막으로, 젊은 지구 창조론이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지구의 역사는 대략 5,000 년 정도인데 반해, 지질학 쪽에서 이야기하는 지구의 역사는 45억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입니다.

저는 기독교, 그것도 개신교입니다. 또한 기독교 근본주의자가 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고 말이죠. 그런 사람의 입장에서 봤을 때 창조과학이란, 그저 졸렬한 타협의 한 방법에 불과합니다. 먼저 생각해봅시다, 과학이란 무엇입니까? 제가 생각하는 과학이란, 보편적인 증명이 가능한 이론들의 총합입니다. 그리고 창조론은, 과학적 증명이 불가능하고, 또 그러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조론과 진화론의 조화는 가능할까요? 이에 대한 제 대답은, 공존은 가능하되 조화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결론입니다.

개신교에는 가톨릭과는 다른 교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루터가 주장했던 다섯 솔라 입니다만, 그 중에 한 가지만 소개하겠습니다. Sola Gratia. 오직 은혜라는 말인데요, 이 말인즉슨 모든 것은 은혜가 아니면 알 수 없다는 것이죠. 신의 존재는 물론, 그분이 하신 모든 일까지 말이죠. 창조에 대한 것은 당연히 포함됩니다.

다시 말하자면, 창조론은 '믿는' 것이며, 창조과학은' 알고자 하는 시도' 입니다. 그런데 개신교의 신앙에서는 'sola gratia' 라 말합니다. , 은혜가 없이는 알 수조차 없다는 말이죠. 게다가 심지어, 창조과학은 과학적 합리성도 존재하지 않는, 그저 인지부조화의 결과물일 뿐입니다. 패러다임이요? 그들에게 창조과학이란, 신앙입니다.

창조론과 진화론은 평행선입니다. 절대 만날 리 없는 것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충돌할 이유도, 서로에 간섭할 권리도 없습니다. 창조론은 지식이 아니며, 진화론은 신앙이 아니니까요. 하지만 그렇기에 동시에, 이런 젓가락과도 같습니다. 혼자서는 한계가 존재하는 것이 분명하기에, 서로 충돌하면서도 함께 존재해야 하는 것이죠.

자 이제 한국 기독교에 대해 설명하기 전에, 한국의 개략적인 근대사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국이 독립한 직후, 남한의 경우 미국의 영향력이 막대한 상황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 미국은 친일파 출신 정치인에 대한 지원과 함께 과거 독립 운동가 세력에 대한 배제의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일제 강점기 시절, 대부분의 독립 운동가들이 진보적인 사상이나 공산주의 사상의 영향력을 크게 받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다는 사실을 들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교회의 경우는 크게 두 종파로 나눌 수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허용했던 통합 측과,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고려신학교(이하 고신) 측이 그 큰 두 개의 줄기입니다. 여담으로, 현재는 고신과 통합, 합동측이 더해져 3개가 기독교장로회의 큰 줄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분파는 많은 탄압을 받았고 세력이 많이 약해진 상황에서 광복을 맞았습니다. 하지만 신사참배를 수용하고 친일에 협력하여 살아남은 기독교 분파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과거에 대해서 제대로 반성하지 못한 상태로 군부정권을 맞았고, 그 권위주의적 정권에 종교적인정당성을 부여하기에 이릅니다. 로마서 131,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혹은 디도서 31,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라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통하여 사회 참여를 통해 권위주의적 정부에 반대하는 이들을 사탄의 유혹을 받은 자들로 매도하는 상황까지 이릅니다. 심지어 바로 다음 디도서 32절에 "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라는 말로써 '건전한 비판'마저 '비방'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이는 이승만에서 박정희, 전두환까지 이어지는 독재자들로 하여금 교회를 직,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여기에 대형교회들의 성장주의 정책이 어우러져 개신교 교회들의 급성장이 이루어집니다.

정치적 관점에서의 결론은 이것입니다. 왜 한국 사회에서 기독교가 우세를 보이는지 알고 싶다면, 왜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 이건 수구 사상인가요?)가 강한지에 알면 됩니다. 한국 사회에서 보수주의는 매카시즘을 방불케 하는 반공 사상으로 인하여 더욱 강해졌고, 그에 대해 종교적 뒷받침을 해 준 기독교는 성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자 그럼 거시적인 관점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사실 여기서 생각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관점이 하나 존재합니다. 이는 외래종교로서의 기독교가 한국의 전통적인 종교 문화와 융화된 결과를 보는 것입니다. 이렇게 융화된 형태를 기복신앙이라고 합니다. , 복을 받기 위해서 신을 믿는다... 뭐 이런 것을 말합니다. 이것의 대표적인 예는, 역시나 수능 날 교회에서 하는 기도회가 있겠습니다.

이러한 기복신앙의 형태로 한국 사회에 스며든 기독교는, 구한말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소외 계층의 희망이 되었습니다. 기독교가 사회 불안 요소들에 대해 비판함과 동시에 사회적 불만을 잠재우는 기능까지 수행한 것입니다. 한 번 더 여담이지만, 기독교는 절대로 기복신앙의 종교가 아닙니다.

개인적인 정보를 밝히자면, 저는 개신교에 속해 있는 크리스천입니다. 명성교회를 다니고 있으며, 저희 가족이 다 그 교회에 출석하고 있습니다. 저는 일명 모태 신앙이라 하여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 손에 이끌려 교회를 다닌 경우입니다. 제가 출석하는 교회는 명성교회입니다. 한국에 있는 많은 대형교회중의 하나이고, 정치적으로 보수 색을 많이 드러내는 분위기입니다. 이것을 비판적인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성경에 대한 지극이 자의적인 해석과 거의 이기주의적이라 할 수 있는 정도의 성장주의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테스탄트로서 가져야 하는 초기의 신앙은 거의 나타나지 않고, 이미 기득권자들의 이익을 옹호하는데 열중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곳에 있습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지식으로 아는 것과, 신앙과의 연관성은 전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이것이 바로 sola gratia입니다. 자 그럼, 질문 있으신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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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지구가 멈추는 날>이라는 영화에서, 교수는 필사적으로 외계의 방문자에게 "인간은 진화할 수 있다"고 외친다. 자, 진화란 적자생존의 환경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인간은 이미 너무 강하다. 자연 환경 속에서, 인간이 진화할 만한 가능성은 이미 '기술'로써 이겨버린 상황이다. 그렇다면, 역으로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어떠한가? 과학문명(대표적으로, 기술)을 진화 요소에 포함하는 것은 어떠한가? 자연에 대한 저항력은 의학이 이미 대체한 지 오래이다. 발톱이나 근력은 석유와 화약이 대신해 주고 있다. 심지어 사냥이나 채집 같은 것마저 '상업' 이라는 이름 앞에 모든 필요성을 상실한 지 오래이다. 인간은 진화보다는 기술 발전이라는 매우 '쉬운' 길을 선택한 지 오래이다. 그런데 현재 상황은 이것이 조금 왜곡된 상황이다. 현재 인간은 진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지구를 지배하게 되어 버렸다. 심지어 이것이 너무 심각한 상황이 되어서, 환경의 허용범위(capability)를 넘어서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 인간에게 기대되는 미래는 하나, '멸종' 뿐이다. 아무리 잘 봐줘도 인구의 생태학적 감소는 피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다시 답은 동일하다. '진화'하는 것이다. 꼭 이러한 진화가 생물학적인 진화일 필요는 없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편이 훨씬 현명한 판단이다. 이미 인간은 적자생존을 넘어선 생명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바로 '인문적 진화'의 시간이다. 적자생존이라 하지 않았는가. 적응 자체가 진화인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적응의 수단으로 '기술'을 선택했다. 즉, '기술 발달'이 답이다. 그러므로 현재까지의 진화(기술 발달)에 만족하여 인구증가속도보다 기술 발달이 늦어질 경우(맬서스의 인구론을 보라) 인간에게 남는 선택은 멸종밖에 없다. 끊임없는 기술 발전을 통해서 지구에 가해지는 부담을 낮추고, 공정한 경쟁 체제의 확립을 통해 진화(기술 발전)를 촉진시켜야 한다.
 이러한 과업의 수행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구라도 적자‘생존’ 이라는 극한의 상황을 즐겁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구조적 모순의 심각성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신재생 에너지, 절약 에너지 등이 현재 상용화된 에너지(대표적으로, 석유)를 따라잡을 때까지, 경제적이고 지속적인 투자와 보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 부분은, 행정학을 하는 이들에게 맡기고, 말 많은 사회학도는 이만 물러가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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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미노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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